정명희||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길가에 늘어선 피라칸타 나무가 단정하게 가지치기 되어있다. 분주했을 사람들의 손끝이 상상된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둘이 함께 헤엄쳐 가다가 맞은 편에서 오는 연로한 물고기와 마주쳤습니다. 이 나이 든 물고기는 젊은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물었습니다. “좋은 아침이네, 젊은 친구들. 오늘 물이 어떤가(How is the water)?” 두 젊은 물고기들은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렇게 조금 가다가, 결국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를 보고 말합니다. “야, 근데 도대체 물이 뭐야?”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2005년 여름, 그가 미국 오하이오주 대학 졸업식에 가서 한 축사의 도입부에 나오는 우화다. 이 물고기 이야기의 요지는, 가장 당연시되고 중요한 것들이 사실은 종종 제대로 보고 말하기는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학교에 근무하는 지인이 전하는 소식에 놀랐다. 졸업 앨범의 판도가 바뀌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용도가 아니라 앨범에 실린 교사의 사진을 온라인상에 올려 교사를 모욕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교사들이 졸업 앨범 촬영 자체를 거부하거나, 앨범에 사진을 싣는 걸 거부하는 추세라고 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교사들 졸업 앨범 사진을 돌리면서 품평하는 경우도 있었다니. 개인정보 문제나 범죄 우려에 선생님들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지난해 한 고등학교에서는 20대 남성이 과거 사제지간이었던 교사를 찾아 흉기로 찌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n번방 성 착취물’ 사건 당시에는 현직 교사 사진을 합성하고 능욕하는 ‘여교사 방’이 운영되기도 했다던가. 신경 곤두세워 살아야 할 판이다.

보건복지부가 2025학년에 늘어난 의대 정원 2천 명을 반영한 각 의대 입학정원을 3월 중에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4월까지 발표하기로 했던 것이지만, 의사들의 투쟁이 가시화되자 앞당겨버렸다. 16일 오후 6시 기준, 전공의 수 상위 수련병원 100곳 중 23곳에서 715명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업무개시명령 후 불이행확인서를 내리자, 원래보다 2배보다 더 많은 480명이 사직 의사를 추가로 밝힌 것이다. 서울 대형 빅5 병원을 포함한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 반대에 따른 사직으로 수술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이겠는가. 결국 환자, 국민이 된다. 게다가 의대 본과 4학년을 비롯한 전국 의대생들이 동맹 휴학하면 각 의대는 학생 없는 3월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의대 졸업에 전공의 과정까지 10년 후에나 배출될 의사 2천 명이 나오기도 전에 현재 활동하고 있던 의사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셈이다.

파업이 장기화하면 당장 내년 신입생을 선발하더라도 의대 교육 자체가 어려워지게 된다. 2025년 예비 신입생 2천 명은 동맹 휴학한 선배들의 복학과 동시에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늘어난 인원으로 입학하자마자 두 학년 학생이 서로 동시에 학업을 해야 하면 강의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2025년 지역인재전형을 중심으로 선발한 신입생의 합격선은 현재보다는 낮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잖은가. 무더기로 증원된 의대생들이 경쟁에서 넘어지면 유급이 속출할 수도 있어 의사의 길은 멀기만 하게 된다.

의료계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는 의대 증원 발표. 갑자기 증원하면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후유증만 심각하게 남길 수 있다. 부디, 의료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협의하여 의료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현명한 판단을 하는 정부이기를. 하루하루 온전한 ‘물’을 경험하며 나의 환자를 위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정명희 (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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