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종공의 아들 죽지랑,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의 영웅

▲ 죽지랑이 득오를 찾아 갔던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의 정상.
▲ 죽지랑이 득오를 찾아 갔던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의 정상.




죽지랑은 신라시대 화랑 출신으로 장군이 돼 백제와의 전쟁, 당나라와 연합해 싸운 고구려와의 전쟁 등에서 크게 공을 세운 대신이다. 진덕여왕 때부터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대까지 재상을 지낸 역사적 인물이다.



죽지랑은 진덕여왕 당시 화랑이 돼 김유신의 휘하로 들어가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몸과 정신을 닦았다. 나중에는 아버지 술종공보다 오히려 김유신의 말을 따르며 장군으로 성장해 나라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훌륭한 대신으로 성장했다.



죽지랑은 김유신의 가르침을 받아 무엇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과의 신의를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친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죽지랑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죽지랑은 그의 이름처럼 속을 비우고, 곧은 성품으로 세상을 살았다. 이 때문에 죽지랑이 죽은 다음 그의 분묘 둘레에는 소나무 대신 대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 부산성과 잇대어 있는 천혜의 절경이자 요새 마당바위 전경.
▲ 부산성과 잇대어 있는 천혜의 절경이자 요새 마당바위 전경.




◆죽지랑의 탄생

신라 선덕여왕 시대에 술종공이 삭주(현재 춘천) 도독사가 돼 임지로 가는데, 때마침 온 나라가 전쟁통이라 기병 3천여 명이 그를 따라 임지로 향하게 했다. 여왕의 그에 대한 신뢰가 두터우며 아끼는 마음이 컸다.



술종공의 무리가 죽지령이라는 고개를 넘고 있는데 고개 마루쯤에서 한 거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고개의 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거사를 불러 술을 따라주며 칭찬했다. “어떻게 이런 힘든 일을 혼자 하고 계신가요”라고 묻자 “우리 백성들을 지켜줄 어버이가 오시는데 아무도 그일을 하지 않으니 미천한 몸이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여겨 길을 내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술종공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면서 거사의 품행이 예사롭지 않음을 여겨 “이 고개를 다듬는 일을 마치는 대로 나를 찾아와서 일을 도와주시면 좋겠소”라며 함께 일할 것을 권하며 추천했다. 거사는 일어나 크게 절하며 “미천한 몸을 알아주시고 거두어주신다니 감사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라며 곧 찾아가겠다고 대답했다.





▲ 죽지랑을 따르던 득오랑을 핍박했던 익선이 다스렸던 모량. 지금도 신라시대 지명이 남아있는 폐역이 된 모량역.
▲ 죽지랑을 따르던 득오랑을 핍박했던 익선이 다스렸던 모량. 지금도 신라시대 지명이 남아있는 폐역이 된 모량역.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해 다스린 지 보름쯤 지나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부부는 너무 놀랐다.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게 했더니 죽었다고 했다.



그 거사가 죽은 날이 술종공 부부가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다”라며 부인에게 조용히 말하고, 아랫사람들을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거사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고는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모셨다.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열달을 꼬박 채워 달덩이 같은 아들이 태어나자 고개 이름을 따라 죽지라 이름 지었다. 죽지는 현명해 하나를 일러주면 열을 깨우쳤다. 또 신체가 빠르게 발달하고 힘이 좋아 주변의 어른들조차 아무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죽지가 자라 어른이 돼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장군으로서 삼국을 통일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 발전에 공헌했다.





▲ 죽지랑의 애신 득오를 핍박했던 익선이 다스렸던 모량. 그 지명이 지금도 신라시대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 죽지랑의 애신 득오를 핍박했던 익선이 다스렸던 모량. 그 지명이 지금도 신라시대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죽지랑의 성장

술종공은 삭주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백성들을 살뜰히 돌보는 장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덕여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다시 궁으로 부름을 받고 서라벌로 들어와 병부와 공부 등 주요한 일을 맡아 처리하는 대신이 됐다.



죽지랑도 성장해 화랑이 됐다. 죽지는 이미 한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사회를 읽어내는 안목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죽지는 아버지 술종공으로부터 가전무술을 온전히 배웠다. 죽지는 타고난 무인체질에다 빠른 습득력,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깊이 빠져드는 집중력으로 15세에 이미 훌륭한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유신이 죽지의 뛰어난 실력과 인품을 마음에 들어하며 가까이에 두고 학문과 무예, 병법 등을 가르치며 아꼈다. 죽지랑은 김유신의 가르침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전쟁터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진덕여왕 3년인 649년에는 김유신 장군을 따라 도살성으로 쳐들어온 백제 군사와의 전쟁에 나서 크게 공을 세웠다. 김유신의 옆에 바짝 붙어 맹수처럼 활약하는 김유신 장군의 움직임을 눈으로 배우는 한편 등뒤로 암습해오는 적군들의 화살과 창을 막아내는 우장군 역할을 하면서 더욱 유신의 신임을 받았다.



▲ 죽지랑을 사모하며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 향가비.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 죽지랑을 사모하며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 향가비.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죽지랑은 651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시에 임명되고 김유신 장군과 국사를 논의하는 대신이 됐다. 물론 김유신과 김춘추의 추천에 힘을 입은 덕분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을 죽지는 잘 알고 있었다.



죽지랑은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를 정벌하는 관산성전투에도 참가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어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역사적 현장에서도 기꺼이 한몫하는 장군으로 활약했다. 668년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나이가 들어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김유신을 대신해 선봉장이 되어 피를 튀기는 전사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죽지랑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욕심을 누구보다 빨리 꿰뚫어보고 김유신과 문무왕에게 엎드려 보고를 했다. “당나라의 속셈이 너무나 뻔합니다. 저들을 물리쳐야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할 수 있습니다”라며 당나라와의 전쟁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죽지는 김유신과 모종의 모의를 진행했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고구려를 정복하고도 물러가지 않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세력을 넓혀가려는 저의를 보일 때였다. 이때 죽지가 소정방에게 김유신과 문무왕의 밀지를 전했다.



“소정방 대장군의 활약에 감사드리기 위해 서라벌에서 왕이 축하를 드리는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며 서라벌로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이어 “김유신 장군이 대장군을 배웅하러 와서 일차 축배를 드리기 위해 상주까지 왔다”면서 당나라 병사들과 편안하게 쉬어가도록 너스레를 떨며 소정방이 긴장을 풀게 했다.



죽지랑의 지혜로 소정방의 당군이 당교까지 내려와 김유신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당나라병사들과 신라군이 한데 어울려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죽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하 김유신 장군의 기지로 소정방 대군은 당교에서 몰살을 당하며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져갔다.





▲ 모량의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모량초등학교.
▲ 모량의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모량초등학교.




◆죽지랑과 득오

당나라를 몰아내는 매소성전투에서 죽지랑이 위험에 빠졌을 때 화랑 득오의 도움으로 죽지랑은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죽지는 득오를 끔찍하게 보살펴 주는 후원자가 돼 늘 곁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날마다 죽지랑의 무리들이 훈련하고, 수련하는 곳에 누구보다 먼저 나오던 득오가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찾아가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



득오의 어머니가 “모량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발령했습니다. 서둘러 가야할 길이 급해 낭께 사직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떠나야 한다면서 장군께 대신 인사를 드리라고 했었지요”라고 답했다.







▲ 죽지랑이 득오를 찾아갔던 모량리에 위치한 박목월 생가 모습.
▲ 죽지랑이 득오를 찾아갔던 모량리에 위치한 박목월 생가 모습.


죽지랑은 떡 한 바구니와 술을 잔뜩 준비해서, 발 빠른 화랑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득오를 위로하러 갔다. 낭도 130여 명이 정장을 입고 죽지를 따라 부산성으로 갔다. 득오를 만나러 오는 죽지랑의 팀들은 보무가 당당했다.



죽지랑이 부산성의 문지기에게 “득오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다. 문지기는 위세에 눌려 “익선의 밭에서 순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득오가 일하고 있는 곳을 손으로 가르켰다.



죽지랑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솔과 떡을 먹이려고 익선에게 시간을 달라 하면서 함께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익선은 완강하게 막으면서 득오를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 관원 간진이 퇴화군에서 세금 30석을 거둬 서라벌로 옮겨가다가 죽지랑이 낭도를 귀중히 여기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익선의 꽉 막힌 태도를 답답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리 간진이 타고 가던 말에서 안장을 풀어주자 그 때서야 겨우 득오를 만나게 허락했다.





▲ 김유신 장군을 따라 죽지랑과 화랑들이 훈련했던 단석산 화랑의 언덕.
▲ 김유신 장군을 따라 죽지랑과 화랑들이 훈련했던 단석산 화랑의 언덕.


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악한 때를 씻어 주라고 하며 신하를 보냈더니 익선이 이를 알아차리고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겨울에 익선의 아들을 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어 죽게 했다.



왕이 이를 듣고 모량리 출신으로 관직에 있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모량 출신은 공직에 들지 못하게 하고, 모량사람은 승려가 되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원측법사가 나라의 큰스님이었지만 모량리 사람인 까닭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죽지랑이 득오를 위한 마음이 우러나 왕에게까지 그뜻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득오는 다시 돌아와 죽지랑을 곁에서 모시면서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됐다.



죽지랑이 죽음에 이르자 득오는 그를 잊지 못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가 ‘모죽지랑가’로 낭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모죽지랑가“지나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애닯게도 아름다운 모습에/ 해 거듭가메 주름이 지니/ 눈 돌릴 사이/ 어찌 만나보게 되오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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