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에 왕위에 올라 16세 요절 ||진신석가를 몰라보고 농을 걸다 낭패

▲ 경주 조양동 성덕왕릉 서쪽에 효소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다.
▲ 경주 조양동 성덕왕릉 서쪽에 효소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은 신문왕이 두 번째로 맞이한 왕비와의 사이에서 출생해 692년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0년 만인 702년 16세에 요절했다.



효소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나이 든 대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신라 특유의 귀족정치 형태를 보였다.



또 망덕사 낙성식에서 남산신을 몰라보고 농을 하다가 낭패를 당하는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등의 미숙한 정치적 상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효소왕이 낙성식에 직접 참여했다는 망덕사는 신라가 당나라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지었다. 이를 확인하려는 당나라 사신의 방문에 대비해 급하게 지었다가 다시 고쳐 지었다고 전하는 호국사찰이다.



효소왕은 사라지고 없지만 왕의 설화가 묻어나는 사천왕사, 망덕사, 석가사, 불무사의 흔적은 지금까지 옛 이야기와 함께 여전히 남아있다.

▲ 효소왕이 남산의 신을 놀리다가 낭패를 당한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 효소왕이 남산의 신을 놀리다가 낭패를 당한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효소왕의 즉위

신라 32대 효소왕의 성은 김, 이름은 이홍(理洪)이며, 이공(理恭)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신문왕이며,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인 신목왕후 김씨이고,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효소왕은 신문왕 7년인 687년 2월에 태어나, 691년 태자로 책봉됐다가 이듬해인 692년 7월에 신문왕이 죽자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효소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원선이나 당원, 순원과 같은 나이든 대신들의 도움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유지하면서 신문왕 때 추진했던 제도개혁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 사천왕사 서쪽 500m 지점에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망덕사 금당터. 멀리 사천왕사지가 바로 건너다 보인다.
▲ 사천왕사 서쪽 500m 지점에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망덕사 금당터. 멀리 사천왕사지가 바로 건너다 보인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자 그를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태대각간으로 추봉했다.



효소왕은 금성에 서시와 남시를 두고, 이를 감독하는 서시전과 남시전을 설치해 관리했다. 또 694년에는 송악과 우잠에 성을 쌓았고, 재위기간 중에 비열주(지금의 강원도 안변)에 둘레가 1천180보나 되는 성을 쌓기도 했다.



효소왕 말기에 접어든 700년 이찬 경영이 모반을 일으키다 처형되고, 중시 순원도 이에 연루돼 파직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나타나기도 했다.

▲ 망덕사 동서쌍탑 중 동탑의 기초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망덕사 동서쌍탑 중 동탑의 기초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효소왕은 702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아들이 없이 죽고, 동생인 김흥광(본명은 융기)이 제33대 성덕왕으로 왕위를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성덕왕은 효소왕의 동생이 아니라 배가 다른 형으로 신문왕의 첫 번째 왕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유사 오대산 보천태자전기에 등장하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수도하던 형제 중의 동생 효명이 난에 성공한 부하들을 등에 업고 왕좌에 앉았다고 설명한다. 형 보천태자는 몸이 하늘로 날아 울진 장천굴로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 수도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효소왕이 망덕사 동쪽에 매장됐다고 기록돼 있는데, 오늘날 경주시 조양동에 위치한 효소왕릉은 사적 제184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 당나라의 대군을 문두루비법으로 물리친 사천왕사 발굴에서 드러난 목탑의 기단부 녹유신장.
▲ 당나라의 대군을 문두루비법으로 물리친 사천왕사 발굴에서 드러난 목탑의 기단부 녹유신장.




◆사천왕사와 망덕사

문무왕 14년(674)에 이르러 당나라 고종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했으나 신라에 대패해 돌아왔다. 당 고종은 매우 노해 이듬해 사신으로 와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책해 옥에 가두고, 50만 군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당에 유학하고 있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통해 이런 사실을 전해 듣고, 신라로 급하게 돌아와 문무왕에게 전했다. 문무왕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대신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독촉했다. 이때 밀교에 깊숙하게 빠져있는 명랑법사가 술법을 잘한다고 신하들이 보고를 했다.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빨리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랑법사가 종이 달린 키보다 큰 환장을 딸랑이며 궁궐에 들어섰다. 왕은 놀라 어떻게 오셨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물었다.





▲ 경주 남산 비파암 일대에 기초석과 석축 등 석가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 경주 남산 비파암 일대에 기초석과 석축 등 석가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명랑법사는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인데 이를 알고 모른 척 산에서 목탁만 두들길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이미 다 알고 왔다”며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어 풍랑을 일으켜 적군을 물리치겠다는 대책을 먼저 술술 풀어 설명했다.



왕은 깊게 숨을 들이켜기를 반복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명랑법사에게 당나라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하라고 청하고는 대신들에게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분야별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라고 주문했다.



명랑법사는 벌써 당나라의 50만 명 대군이 신라를 향해 바다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풀로 오방의 신상을 만든 다음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당나라군사들을 모두 수장시켰다.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을 시전한 그 절이 사천왕사다.



당 고종은 다시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했다. 거듭 대군을 보내어도 작은 나라 신라를 이기지 못한 당 고종은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가뒀던 박문준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다.



박문준은 “신라가 당나라에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경주 낭산 남쪽에 새로 절을 지어 당나라 황제의 복운을 빌고 있다는 것만 들었다”고 대답하며 “신라에서 떠나온 지 오래되어 자세한 일은 잘 모른다”고 했다.



▲ 비파암 주변 석가사 건너편 언덕에 불무사 터로 보이는 곳이 바위숲으로 둘러 쌓여 있다.
▲ 비파암 주변 석가사 건너편 언덕에 불무사 터로 보이는 곳이 바위숲으로 둘러 쌓여 있다.


고종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신라에 보냈다. 당으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보이지 않으려고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



신라는 당나라 사신 악붕귀를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다. 악붕귀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신라의 대신이 안내하는 절에 들어가지도 않고 문밖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며 돌아섰다.



신라는 그날 밤 금 천 냥을 악붕귀의 손에 쥐어 주고, 열흘 동안이나 주연을 베풀어 당나라 사신을 매수했다. 거나하게 대접을 받고 당으로 돌아간 악붕귀는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습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대신해 맞은편에 새로 지은 절을 악붕귀의 말을 비롯해서 망덕사라고 불렀다.

▲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낭산 동쪽에 지었다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낭산 동쪽에 지었다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남산의 신과 효소왕

신라 문무왕 대에 당나라 사신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사천왕사 앞에 임시로 지었던 망덕사를 새로 짓고, 효소왕 8년인 699년에 낙성회를 열었다.



효소왕은 오랜만에 궁궐을 벗어나 야외로 나들이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에 흥분이 돼 용포를 벗고 편안한 복장으로 나섰다. 심지어 왕이 타는 가마조차 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나들이길에 올랐다. 계절도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고,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른하게 풀리는 봄날이었다.



가볍게 승마로 몸이 풀린 왕은 마냥 어린아이의 마음이 부풀어 목청도 한껏 고양되고, 얼굴도 상기됐다. 나이 든 대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좀체 먼저 말을 걸지 않던 왕이 옆자리 아무에게나 농을 던지면서 큰소리로 웃곤 했다.



낙성재를 올리고 은은한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공양하는 시간이 됐다. 왕은 이리저리 다니면서 차려진 음식들을 맛보며 곳곳에서 몰려온 고승들과 대신들에게 이런저런 궁금증을 쏟아내면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때 누추하게 차려입은 늙은 중이 다가와 왕에게 싱글싱글 웃으며 “나도 공양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청했다. 장난기가 동한 왕도 빙긋이 웃으며 “내가 누군데 나보고 공양을 청하는게요”라고 넌지시 농을 던졌다.



그러자 중이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마음대로 먹고 노니는 것을 보니 그만한 청을 들어줄 정도는 될 위치인 것 같으오”라고 하니, 왕은 또 “그대는 어디서 온 중이요”라고 놀렸다.



늙은 중은 “남산 비파암에 사는 땡중이오만, 밥 한 그릇도 줄 입장이 안되거든 이런저런 지청구는 그만두시지요”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왕은 더 이상 길게 농을 하고 싶지 않아 “그대 옷값으로 미루어 저 아래 아무데나 앉아 공양이나 하고 가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잔뜩 배부르게 공양을 마친 왕은 다시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농을 하다가 예의 그 늙은 누추한 옷을 입은 중 앞에서 “그대는 어디 가거든 낙성식에서 임금과 한자리에서 공양을 했다고는 하지 마시오”라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중도 슬핏 웃으면서 “임금님도 어디 가시더라도 낙성식에서 진신석가와 같이 공양을 즐겼다고 말하지는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옷자락을 펄럭이고 일어서더니 구름을 타고는 남쪽으로 날아가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산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연거푸 아홉 번이나 절을 올리고, 신하들에게 빨리 가서 찾으라고 강요했다.



스님은 남산 비파를 닮은 바위가 우뚝 서 있는 비파바위 앞에 이르러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아두고 숨어버렸다. 신하들이 돌아와서 효소왕에게 복명하니, 왕은 남산 비파암 아래 석가사를 세우고, 그의 자취가 사라진 바위 앞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누어 두고 법회를 올렸다.



두 절이 있었던 흔적은 비파암 주변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지팡이와 바리때는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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