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기증이 나서 의자에서 일어설 수도 없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남편은 수염도 깎지 않은 채 옷만 갈아입고 2층 아래에 있는 어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아마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라고, 남편은 방을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도쿄 기담집」(2006, 문학사상사)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해보게 된다. 가령 등장인물이 “** 엘리스의 짙은 감색 실크 셔츠 위에, 같은 색깔의 여름용 재킷을 입고 있었다”와 같은 묘사가 나올 경우, 그 브랜드를 모르는 나로서는 ** 엘리스라는 브랜드를 찾아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루키 소설에서 인물들이 입거나 신거나 착용하고 나오는 브랜드는 그 사람의 경제적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적 취향이나 성격, 학력이나 성장 배경 등을 알리는 기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순수한 호기심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지금으로서야 하루키의 이러한 서술 방식이 시대를 앞서갔음을 인정해야겠다. 예컨대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일단’ 상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함으로써 그(녀)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한다. 타고 온 자동차를, 이후로는 옷과 신발, 가방 등의 브랜드를 확인하는 게 순서다. 옷의 상표가 그 옷을 입은 사람을 설명한다는 게(대체 무엇을?) 사실 황당한 소리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가의 브랜드를 걸친 대상에게서 일종의 아우라를 느끼는 듯싶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아니면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 같은 21세기형 문맹자는 어딘가 꼰대처럼 여겨지는 시대인 것이다.

굳이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이유란, 폭염이 지속되는 한여름에 등골이 오싹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함께 읽고 싶어서였다. 마침 눈에 띄는 게 그의 ‘도쿄 기담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기담집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거나 괴기스러운 이야기는 없다. 인용한 소설은 아파트의 24층과 26층 사이 계단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고 사설탐정에게 의뢰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에 따르면 같은 아파트의 24층에는 3년 전에 과부가 된 시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26층에 살고 있다. 소설은 감쪽같이 사라진 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일 만에, 실종된 당시와 똑같은 차림으로 센다이 역 벤치에서 노숙자 꼴로 발견되는 걸로 끝이 난다. 희한하게도, 돌아온 여성의 남편은 지난 20일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사설탐정의 눈에 비친 여인의 캐릭터는 뾰족한 콧날과 뾰족한 하이힐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가 묘하게도 독자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때문에 독자들은 책을 덮으며 남편의 행적에 대해 나름의 추리를 해보는 것이다. 불안신경증으로 툭하면 자식을 부르는 어머니와 매사가 ‘뾰족한 게’ 특징인 아내 사이에서 살아간다면, 누군들 20일 정도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싶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신상조(문학평론가)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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