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5대 풍월주 사다함…17세 나이 친구 따라 죽어

▲ 신라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귀당비장으로 출정해 공을 세우고, 풍월주가 됐던 사다함의 초상이 화랑마을 전시관에 걸려있다.
▲ 신라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귀당비장으로 출정해 공을 세우고, 풍월주가 됐던 사다함의 초상이 화랑마을 전시관에 걸려있다.


사다함은 신라시대에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화랑의 표상이다. 충과 효에 대한 뜻을 전달하고, 젊은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사다함은 내물왕의 7대 손으로 급찬 구리지와 금진궁주의 아들이다. 진골 출신으로 풍채가 수려하고 청수하고 지기가 방정해 따르는 자가 많았던 진흥왕 시대의 화랑이다.



화랑으로 추대돼 1천 명의 낭도를 거느렸다. 562년 진흥왕 23년 9월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15세의 어린 나이로 종군을 신청해 귀당비장으로 출정했다.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국경선에 있는 적군의 성문 전단랑을 기습해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큰 공을 세웠다.

이 같은 공을 인정한 왕이 가야인 포로 300명을 노비로 하사했지만 모두 풀어줬다. 또 왕이 많은 땅을 부상으로 줬지만 사양하다가 거듭되는 왕의 뜻을 받아들여 알천의 불모지만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관랑과 우정을 맺어 함께 죽기를 맹세하여 무관랑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7일간 슬퍼하며 통곡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렀다.

▲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낭주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담을 넘다 저수조에 빠져 상처를 입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월성의 북쪽 해자 복원 전경.
▲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낭주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담을 넘다 저수조에 빠져 상처를 입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월성의 북쪽 해자 복원 전경.




◆사다함의 출생

사다함은 신라 화랑의 창시자이자 제1대 풍월주를 지낸 위화랑의 외손이자 소지왕의 손자이기도 하다. 위화랑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오도궁주와 인연을 맺어 옥진궁주와 금진낭주를 낳았다. 금진은 언니인 옥진과 같이 법흥왕의 후궁이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법흥왕이 죽자 금진은 왕궁에서 나와 문상이라는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때 소지왕과 벽화의 아들 구리지가 찾아와 끈질기게 사랑을 구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다. 금진은 구리지와의 사이에 토함과 사다함 형제를 낳았다.



신라 화랑은 아들에게만 세습이 된 것이 아니라 딸을 통해서도 세습됐다. 신라의 골품이 딸에게도 세습되었던 것과 같이 화랑 또한 혈통으로 이어졌다. 토함과 사다함 형제는 나란히 화랑이 됐다.



구리지 부부는 물론 당시 사람들은 토함과 사다함 형제를 두고 “기골이 장대하고 뛰어나 할아버지 비량공(소지왕) 못지않고, 아름다움은 할머니 벽화보다 낫다. 분명 신라의 주춧돌이 될 인재”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 사다함이 귀당비장으로 전쟁에 나섰던 고령 대가야의 고분군.
▲ 사다함이 귀당비장으로 전쟁에 나섰던 고령 대가야의 고분군.




◆사다함의 전쟁

사다함은 특히 얼굴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인품이 뛰어나 낭도들이 스스로 따라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진흥왕이 화랑이었던 토함을 동륜태자를 호위하게 하자 토함은 “나는 태자의 호위를 맡아 하루도 궁을 비울 수가 없으니 풍월주 부제의 자리는 네가 대신해야 한다”고 화랑 풍월주 부제의 자리를 물려줬다. 이에 사다함은 이화랑 풍월주의 부제가 됐다.



이때 화랑의 무리 중에 신분이 낮지만 무예와 인품이 뛰어나 인심을 얻고 있는 무관랑이라는 화랑이 있었다.



사다함은 무관랑의 인품에 반해 좋아했고, 무관랑 역시 사다함의 여유롭고 아름다움에 취해 서로 벗이 되고 싶어 했다. 무관랑이 “공자께서는 맹상군의 풍모를 지니고 계십니다. 삼가 신하가 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사다함은 “당치 않다. 내가 어찌 그들과 견줄 인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사양하면서 서로 기쁘게 신하와 상관이 되고 벗이 됐다.



사다함과 무관랑은 주변의 사람들이 오해를 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지냈다. 책을 읽거나 무예 수련을 하는 일은 물론 벗들과 어울려 다닐 때조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실과 바늘이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 사다함의 사랑으로 전해지는 미실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이 월성 입구에 있다.
▲ 사다함의 사랑으로 전해지는 미실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이 월성 입구에 있다.


사다함은 12세부터 문노에게서 격검을 배웠다. 사다함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총명하고 지혜로워 낭도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사다함의 성품 또한 어질고 너그러워 따르는 낭도가 1천 명을 넘었다.



561년 대가야를 다스리던 양화공주가 죽고 도설지가 왕위에 올라 왜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진흥왕은 태종공 이사부에게 대가야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16세이던 사다함이 선봉으로 출정하겠다고 청했지만 진흥왕은 나이가 어리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다함이 자신을 따르던 낭도들을 추슬러 스스로 출정할 준비를 하자 왕은 어쩔 수 없이 사다함을 귀당비장으로 임명하고 선봉장으로 나서게 했다.



사다함이 전쟁터로 나간다고 하자 어머니 금진낭주와 새로 사랑의 단맛을 느끼던 미실은 그를 만류하기에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귀당비장으로 출정한 사다함은 선봉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도설지왕이 대가야의 도읍인 주산성에서 신라군을 맞아 악착같이 방어했다. 사다함은 정예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대가야 주산성으로 질풍처럼 달려가면서 “가야는 백제와 연합해 우리 관산성을 공격했다. 관산성에서 죽어간 우리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 군사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종횡무진하며 장창을 휘둘러 적진을 교란했다.





▲ 사다함과 관창 등 화랑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경주 화랑마을 전시관에 마련된 궁도체험장.
▲ 사다함과 관창 등 화랑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경주 화랑마을 전시관에 마련된 궁도체험장.


이에 가야군이 후퇴하고, 기세를 잡은 신라군이 주산성을 공격했지만 성문을 굳게 닫은 가야군의 저항에 쉽게 성을 빼앗지 못했다. 이때 사다함이 황룡대도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달려가 좌충우돌하며 적군을 베면서 마침내 성루로 올라가 흰색 깃발을 꽂았다. 그 뒤를 따라 신라군들이 밀고 들어와 가야의 도설지왕과 왜국의 여장을 사로잡았다.



진흥왕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다함을 불러 “어린 화랑이 큰 공을 세웠다”면서 치하하고 많은 논밭을 하사했다. 사다함은 “신이 전장에 나아가 용맹하게 싸운 것은 벼슬이나 재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폐하의 신하로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충심이었습니다”라며 보상을 사양했다. 그리고 노비로 하사한 가야인들을 모두 풀어주어 양인이 되게 했다.



진흥왕은 “과연 신라의 화랑이다. 그러나 국가의 상벌이 없을 수는 없다. 내가 너를 포상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색한 군주라고 할 것이다. 네가 나를 인색한 군주로 만들려고 하느냐”고 하자 사다함은 어쩔 수 없이 알천 근처의 불모지 수백경을 택해 보상으로 하사 받았다.



이화랑이 진흥왕을 수행하는 장군으로 발탁되자 그 뒤를 이어 사다함은 신라의 제5대 풍월주가 됐다. 설성과의 사이에서 어머니 금진이 낳은 동생 설원랑을 부제로 삼았다.



풍월주가 됐지만 사다함은 1년을 못 넘기고 친구를 따라 죽음을 맞았다. 기록으로 남은 풍월주 중에서는 가장 짧은 기간이다.







▲ 화랑이 앞장서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 화랑이 앞장서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사다함의 사랑과 우정

미실이 세종의 아내로 궁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세종과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미움을 받아 출궁됐다.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을 가기 전에 사다함과는 서로 연모해 미실은 “나의 남편은 사다함과 같아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다함이 청혼하기 전에 미실이 궁으로 불려들어가 세종의 아내가 돼 버렸다.



미실이 궁에서 쫓겨나자 사다함은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기회”라며 미실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미실은 사다함을 만나 서로 사랑을 불태웠다.







▲ 사다함과 무관랑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화랑마을 전시관의 화랑 동상.
▲ 사다함과 무관랑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화랑마을 전시관의 화랑 동상.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늘 꽃길을 걷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신라가 가야와의 전쟁을 하게 되고, 사다함은 1천여 명의 낭도를 거느린 화랑으로서 전쟁터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미실을 떠나야 했다.



미실은 밤새도록 울면서 호소하다가 “낭군께서 전쟁터로 떠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갚은 산이나 바닷가 섬으로 달아납시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사다함은 “나는 화랑이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오”라며 미실을 뿌리치고 전쟁터로 나섰다.



이때 미실은 출정하는 사다함을 위해 “바람이 분다 하되 님 앞에서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 하되 님 앞에서 치지 마오/ 님이여 어서 돌아와 안아주오/ 사랑하는 님이여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네”라며 출정가를 불렀다.



전쟁에 공을 세우고 사다함이 서라벌로 돌아왔을 때 미실은 지소태후의 명을 받고 다시 세종의 아내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사다함은 미친 듯이 광야를 뛰어다니면서 슬퍼했다. 미실은 세종의 부인이 돼 권력을 누리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 신라 화랑들이 출전할 당시의 군마장비.
▲ 신라 화랑들이 출전할 당시의 군마장비.


사다함은 “청조야 청조야 저 구름 위의 청조야/ 어찌해서 내 품속에 내려왔는가/ 청조야 청조야 내 콩밭의 청조야/ 어찌해서 다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들어갔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나 말지 또 가려거든 무엇하러 왔는가/ 눈물을 비처럼 흘리게 하고/ 애가 타고 몸이 말라 죽어가게 만드는가/ 나 죽으면 무슨 귀신이 되려나/ 나 죽으면 신병이 되리/ 위용이 당당한 대궐에 날아가 아침이나 저녁이나/ 청조 부부 보호하며 천만년 동안 길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며 청조가를 불렀다.



청조가는 미실낭주를 새에 빗대어 부른 애절한 사랑 노래다. 대궐에서 살다가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다시 대궐로 돌아간 미실낭주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해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하며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사랑을 잃은 사다함에게 또 하나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전쟁에서도 함께 말을 달리며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던 벗 무관랑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사다함은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1주일 내내 잠을 청하지 않고 통곡하며 슬퍼하다 무관랑을 따라 저승으로 가버렸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정복군주 진흥왕 시대 젊은 피의 화랑이 채 피어나기도 전에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사다함.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화랑의 제5대 풍월주 사다함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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