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 류정원 선생 ‘당호’ 따 지어져 ||‘류정원’, 조선 왕세자인 사도세자의 스승 ||

안동 전주류씨 삼산종택(이하 삼산종택)은 삼산 류정원(1702~1761) 선생을 향불천위(유림들이 옹립한 불천위)로 모시는 고택이다.

안동 예안면 주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으로 1750년(영조26년)에 류정원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산종택은 1982년 12월1일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

삼산종택의 명칭은 삼산 류정원의 당호를 딴 것이다.

당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류정원이 고택의 안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앞산의 산봉우리 셋이 나란히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삼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후 삼산은 고택이 위치한 마을명으로 불리게 됐다.



◆삼산 류정원을 논하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류정원의 자는 ‘순백’이며, 호는 ‘삼산’이다.

11대 류숙의 넷째 아들로 류익휘의 장자인 류상시의 손자이다.

1751년 안동으로 귀향해 향음주례(향촌의 유생들이 향교 및 서원 등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켜 잔치를 하는 향촌의례)를 실시하고 여강서원(호계서원·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처음 세워진 서원)에서 회강(한 달에 두 번씩 왕세자가 그의 교육을 맡은 사부와 벼슬아치 앞에서 이미 배운 것을 복습하던 것)했다.

류정원은 중정의 도를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시세를 읽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컫는다.

그는 비운의 조선 왕세자인 사도세자의 스승이다.

당시 사도세자와 류정원의 상황은 서연강의(사도세자의 서연에서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책)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53세의 류정원과 20세의 사도세자가 경전 구절을 풀이하며 이끌고 따랐던 장면이 서연강의에 기록돼 있다.

영조가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높은 인격과 학문을 지닌 류정원의 치적은 목민심서(정약용의 저서)에도 자세히 실려 있을 정도다.

류정원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일이 목민의 이절이라 목민심서에 11차례나 기록돼 있다고 한다.

당시 류정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류정원에게 있어 평생의 연구 대상은 ‘주역(유교 경전)’이었다.

44살 때 ‘역해참고’와 ‘하락지요’라는 저서를 완성한다.

그의 저술 가운데 조령(문경새재)의 산성 설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경세가(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로서의 면모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류정원은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안동 풍산읍 일원에는 체화정(2019년 보물 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체화정의 현판 왼쪽 하단에 ‘삼산주인’이라는 주인(도장)이 새겨져 있다.

류정원이 이 현판을 쓴 이유는 체화정의 주인과 사돈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전주류씨의 위상

류습(1367~1439)를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가 안동으로 입향한 것은 입향조(처음 그 지방에 이사를 와서 정착한 조상) 류성(1533~1560) 때이다.

류성의 아들은 류복기와 류복립이다.

류복기는 곽재우 의병과 임진왜란 당시 화왕산 전투에서 공은 세운 인물이다.

류복립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안동 지방에 살고 있는 전주류씨의 후손은 모두 류복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류복기의 아들 6명이 안동 임동면 수곡리를 근거지로 취락을 이루고 살게 됐다.

이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류정원의 손자), 만산 류창식 등을 배출한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류휘문의 경우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일생동안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는데, 성리학과 역학, 천문지리는 물론 의복제도와 음악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한 인물이라고 한다.

전주류씨 가문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독립운동가 10여 명을 배출한 안동의 대표 독립운동가 집안이기도 하다.

한일 합방을 전후해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류시연,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해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한 류인식, 유림 대표로 자리장서의거의 주역으로 불리는 류필영과 그의 아들 류만식,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류림 등이 애국지사로 활약한 전주류씨의 후손이다.

이밖에 안동에서 의방항쟁을 펼친 류창식, 6·10만세운동을 이끈 류면희, 신간회 안동지회를 이끈 류기태·류기만·류기복,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약한 류기준 등도 한국 근대사의 자주독립과 시민국가 형성에 기여한 인물로 꼽힌다.

특히 이들이 펼친 구국운동의 출발은 유교적 중화주의였지만 다양한 정치이념과 사상을 수용해 민족이 처한 식민의 현실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는 점이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삼산종택이 지닌 민속적·건축적 가치

삼산종택은 안동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0㎞가량 떨어진 예안면 주진리의 산기슭 아래에 위치해 있다.

주진리는 예로부터 낙동강의 나루터로 유명했다고 한다.

삼산은 원래 ‘밀양박씨’ 일가가 살았던 오른대마을 북쪽의 마을이다.

조선 숙종 때 류정원의 부친인 류석구가 개척한 뒤, 류정원이 이름을 떨치면서 마을 이름이 삼산이 됐다고 전해진다.

삼산종택은 건물적 구조 체계는 독특하다.

안동의 ‘ㅁ’자 뜰집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했지만 안채 영역과 사랑 영역이 나뉘어져 복합적으로 이뤄진 형태를 띠고 있다.

기본적인 집 구성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헛간채다.

대문채를 기준으로 서측에는 사랑채가 남향으로 서 있다.

사랑채 뒤 쪽에는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작은 마당을 지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삼산종택의 구조적 이력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유교 사상으로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남자는 바깥에 거처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남자는 함부로 내당에 들지 않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아니한다’를 기록이 남겨 있어 남녀의 공간 구별을 시행했다.

안동의 ‘ㅁ’자형 집은 통상 안채에서 일반적으로 건넌방(대청을 사이로 안방의 맞은 편에 있는 방)을 두고 있다.

하지만 삼산종택은 좌익사에 마루와 방을 둬 며느리가 거주하고 점침의 안방에는 시어머니가 거주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 부엌과 연결된 우익사는 집안일을 거드는 집사들의 공간으로 안채 좌측의 헛간채와 연결하기 쉽도록 했으며, 가축을 기르거나 곡식을 저장하는 일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ㅁ’자형 집에서는 사랑 영역이 구성될 경우 익사(중심이 되는 집채의 좌우에 붙어 있는 곁채)의 일부를 함께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산종택에서 아랫사랑과 연결되는 익사는 문이 없이 막혀 있다.

이는 사랑채가 별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 영역이 축소됐기 보다는 외부로 분리된 구조로 볼 수 있다.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집인 사당의 경우 사랑채 배면에 안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사당 사면을 둘러 높은 축담이 서 있어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산종택은 2006년 원인불명의 화재로 사랑채와 대문채 일부가 소실됐다.

이후 2007년 사랑채가, 2008년 대문채와 담장이 보수됐다.

사랑채의 전면부는 대청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대청은 우측까지 연결돼 있다.

복원 후에도 이 형태는 그대로 유지됐다.

마루의 끝에 계자 난간을 설치했고 팔작지붕의 형태가 복원됐다.

사랑채의 배편을 살펴보면, 사랑채 배면에 방과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연결시켜 주며 잠시 걸터앉을 수 있는 생활의 완충공간인 툇마루가 복원됐다.

배면의 아래궁도 원형과 흡사하게 복원됐다.

이밖에 삼산종택의 인근에는 류정원이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가 위치해 있다.

삼산정은 경북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돼 있다.

삼산정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으로 이뤄졌다.

정자 주위에 담장이 있고 출입문으로 일각문이 있으며 큰바위가 마당 끝에 있다.

우측에는 2개의 온돌방이 있고 어간(큰 방의 한 복판)은 대청이다.

좌측은 앞 1칸이 마루이나 뒤쪽 1칸은 온돌방이다.

누하주(마루 밑에 세우는 기둥)와 누상주(마루 위에 세우는 기둥)는 별주이다.

누하주는 굵직한 부재를 사용했고 방의 시설을 위해 누하의 일부는 고막이벽 행태로 구성됐다.

누상의 구조는 고주(여러 개의 기둥 중 특히 높은 기둥)를 쓰지 않아 가운데 주열(열을 지어 세운 기둥)이 있으면서 가구는 간편하다.

구조 대신 평주(밭둘렛간을 감싸고 있는 기둥)와 같은 높이의 기둥을 세워 대량은 부득이 합보된 상태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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