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으로 정할래요?

발행일 2022-01-23 11:23: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산등성이 훤히 보이는 진료실 창가에 서서 이른 아침의 기분을 정하곤 한다. 어디선가 눈발이라도 흩날려 내려올 듯 잔뜩 하늘이 내려앉은 오늘, 참으로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저 산 위에 하얀 눈이 쌓여도 좋겠고 영상의 기온으로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더 멋진 풍경이 펼쳐질 터이니. 멀리 있는 알프스도 퐁듀가 맛있던 샤모니 마을도 부럽지 않은 정겹고 사랑스러운 풍광이 머릿속을 즐겁게 한다.

통창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책상 위에는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거북이 세 마리가 녹색 잔디 위에서 하얀 금이 그어진 트랙을 달려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한 마리는 맨 앞에 서 기어가고 있고 또 한 마리는 힘이 다 빠져버린 듯 지쳐 보이지만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양새로 앞에서 두 번째 위치에 있다. 꼴찌로 뒤처진 거북이는 몸통은 마지막에 있어 누가 봐도 맨 마지막 순위를 차지할 것 같지만, 어느 틈에 목을 있는 대로 다 뻗어내어 결승선에 머리가 닿아있는 것 아닌가. 어느 해였던가. 막내 아이와 함께 갔던 여행지에서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그 사진이 주는 느낌이 묘하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집어 들었던 것인데,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힘이 솟는 듯해 늘 곁에 두게 됐다. 경주하는 거북이들 사진 맨 위에는 커다랗게 ‘SUCCESS’라고 씌어 있다. 내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각자의 마음대로 읽으며 상상한다. “얘는 목이 아픈가요? 키 커 보이려고 목을 이렇게 뻗었어요? 거북이 목이 정말 이렇게 길어요? 애는 반칙한 것 아니에요?” 종알거리며 귀를 쫑긋 세워가며 설명을 듣는 아이들이 귀여워서 찬찬히 설명해준다. ‘성공이란 목을 감히 쭉 뻗어보는 자의 것이다’라고.

33년, 공공병원에서 근무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어느 날 문득, 다른 세상에서 공부해보고 싶어 이민 가방 여섯 개를 꾸렸다. 세상에 가장 치열하게 살아볼 것 같은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훌쩍 떠났다. 그곳에서 나의 관심 영역을 마음껏 공부했다. 청소년 의학, 사춘기 발달에 대해서, 잘 자라지 않는 키에 대해서, 성조숙증 치료하는 것을 경험하며 열심히 파고들었다. 생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귀한 뜻밖의 선물, 경험과 추억도 많이 쌓였다. 9·11 테러가 미국 땅을 공포에 몰아넣었을 때 아는 이 없는 낯선 땅에서 무척이나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었다. 가족이 함께 있어도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돼 다시는 내 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부모 형제 얼굴도 못 보고서 구천을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두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는 곳에서 지진까지 났다. 사이렌 소리 같은 건물이 뒤틀리며 우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천장에 매달린 등이 마구 흔들리고 침대가 기울고 유리창에 금이 갔다. 그것을 보고는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절대자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으니, 지금, 순간의 기분을 무엇으로 정할까. 바로 ‘행복’으로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살아남은 것이 감사해서, 훌쩍 떠났던 나를 2년 여 시간 기다리다가 다시 찾아오는 나의 환자들이 고마워서 고개를 박고 자리를 지키며 다시 일했다. 하루가 한 달이 되고 또 10년이 되고 20년이 돼 어느덧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들썩거려도 한평생 한길을 파며 한곳에서 업을 마치는 것이 좋을까? 또 다른 곳에서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로 떠나보면 어떨까? 생각이 날마다 극과 극을 달리며 이곳저곳 그곳을 오가곤 했다.

드디어 결정했다. 나만의 공간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기로. 코로나 19가 한창이라 모두가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듯할 때 개원을 감행했으니. 말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가깝게 지내던 선배는 도시락 싸 들고 따라다니며 말리겠다면서 장시간 여러 차례 전화해 개원의 어려움에 대해 충고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어떤 일이 있어도 하겠다고 정했으니 어쩌겠는가. 뜨거운 여름 열기도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을 정해 이리저리 구도 잡고 설계하며 땀 흘리며 가슴이 뜨거워 왔다. 사방이 훤히 다 보이도록 전면을 통유리로 치장하고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공간을 진료실로 정했다. 창 너머 보이는 산과 하늘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만끽하면서 나를 찾아오는 이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개원하면서 맨 먼저 떠올린 장면도 바로 이 거북이 사진이었다. Success belongs to those who stretch out their necks. 땀 흘리는 이들에게 늘 시원한 청량제가 되리라.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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