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죽걸산

발행일 2022-01-16 14:56:3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알프스 몽블랑이라고 마음껏 이름 붙인 앞산이 바라다보이는 진료실 창가에서 새해의 계획을 수정한다. 작심삼일로 끝나 버린 결심을 조금은 실천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부정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정했던 것이 그만 이틀도 지나지 않아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낸 까닭에서다. 마음으로 안되는 일은 몸이라도 움직여가며 머리에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기로 하면 어떨까.

설날 연휴가 지날 때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연장됐다. 모이는 인원이 4인에서 6인까지 늘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됐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던 구호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생활해야 안전한 환경이 돼버렸다. 뭉쳐있으면 감염의 위험이 크고 흩어져 거리두기를 지키면 그래도 조금은 더 안전하다는 눈치니까. 바깥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몸은 살집으로 불어나고 그와 더불어 과체중에 비만이 될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아이들도 덩달아 뻥튀기 기계에라도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자고 나면 부은 것처럼 몸무게가 불어나 고민이라며 병원을 찾는다. 코로나19가 지속하는 2년 여 기간 동안 불어난 살로 성조숙증 검사까지 받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식사량을 일정하게 하고 몸을 많이 움직이라고 조언하지만, 한번 불어난 살은 빠질 줄을 모르고 끈질기게 상승곡선을 이어간다.

8층에 있는 내 진료실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권유한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걸어서 올라오면 멋진 선물을 줄 거야” 라고. 새해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 귀에 속삭였지만,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유는 다양하다. “엄마가 너무 바쁘다고 해 오늘만 엘리베이터 탔어요”, “주차하기 힘들어서 얼른 진료받고 가야 해서요”, “집에 과외 선생님 오시기로 돼 있어서요”, “태권도 학원 갈 시간이 임박해서요.” 들어보니 모두 수긍이 간다.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 딱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계획이란 것은 늘 미루다가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지 않던가.

일전엔 초등 1학년 짜리 여자아이가 양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8층까지 걸어서 올라왔다며 숨을 쌕쌕대면서 히말라야 등정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너무 대견해 싱가포르산 멀라이언 초콜릿 하나를 선물로 건넸다. 그때 끝없이 올라가던 그녀의 입꼬리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공직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후 퇴직해 전원생활을 하는 이의 집 대문에는 와사보생(卧死步生)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으로 우리말 사자성어로는 ‘누죽걸산’이라고 맞받아야 하지 않으랴 싶다.

동의보감에도 건강과 장수에 관해 ‘약으로 보하기보다 먹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걷는 행보(行步)가 낫다’고 했다던가. 인간의 뼈는 적당한 자극을 가해야 굵어지고 튼튼해진다. 몸의 근육도 쓰면 쓸수록 강하게 발달한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편하게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건강해진다.

자주 걷지 않으면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누우면 약해지고 병들게 되지만 걸으면 건강해지고 즐거워진다. 허리는 가늘수록 좋고 허벅지 둘레는 굵을수록 좋다. 의자에서 일어나 언제 어디서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무조건 많이 걸으면 대부분의 병은 도망갈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나가면 죽고 집에 있으면 산다는 ‘나죽집산’이 아직도 유행어 목록에 들어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한적한 곳을 택해 가능한 걸음부터 시작해 ‘누죽걸산’을 실천해가며 건강한 새해의 계획을 실천해보기를 권한다.

UN이 발표한 새로운 연령 구분은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세~79세는 중년, 80세~99세는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 노인이다. 중년이 66세~79세라고 하니, 지하철 공짜 이용자인 ‘지공선사’도 UN의 연령 구분으로는 청년에서 이제 막 중년이 시작되는 나이지 않은가.

영화 ‘두 교황’의 대화 장면에는 스마트 워치가 보인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상의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두 교황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베네딕토 16세의 손목에 있는 스마트 워치에서 경고음과 함께 ‘움직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두 교황은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다.

부모가 나이 들어서 자식에게 주는 최고의 마지막 선물은 죽는 날까지 자기 발로 화장실에 다니는 것이라니.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앞날을 기대하며, 미래의 삶을 생각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근육을 움직여 걷고 또 걸으시기를.

오늘도 ‘누죽걸산’으로 두 발로 걸으면서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시며 더없이 멋진 하루 보내시길.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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