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품다/김임순

발행일 2022-01-13 14:09:3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팍팍한 심연에도 악기 하나 품고 산다/사람을 닮은 모습 목소리를 닮은 음색/그 전율 전해오는 밤 도도히 숨을 싣고//품은 파도 뿜어내는 먼 바다로 나가자/심해에서 건져 올린 울림은 북극의 봄날/순록은 눈 속의 이끼 그 향기에 취한다//천 개의 바람소리 휘감겨서 다시 떠는/잔망(孱妄)도 선망(羨望)도 G선 위에 달빛이다/사랑아, 눈물로 현을 매어 젖어 든 이 한 몸

「오늘의시조」 (2019, 제13호)

현악기인 첼로나 바이올린과 건반악기인 피아노 등에서 영감을 얻어 태어난 시편들이 적지 않다. 음악과 시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첼로를 품다’도 그러한 관점과 체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팍팍한 심연에도 악기 하나 품고 산다, 라는 진술은 진지하다. 심연을 가진 화자가 삶의 팍팍함을 자주 느끼곤 하다가 악기를 품게 된 것이다. 팍팍함을 덜어내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을 닮은 모습 목소리를 닮은 음색을 통해 전율이 전해오는 밤에 도도히 숨을 싣고 품은 파도 뿜어내는 먼 바다로 나가자, 라고 권유한다. 그리하여 심해에서 건져 올린 울림은 북극의 봄날이어서 순록은 눈 속의 이끼 그 향기에 취한다, 라고 노래한다. 천 개의 바람소리가 휘감겨서 다시 떠는 잔망 즉 얄밉도록 맹랑하거나 경망스러운 데가 있는 점과 선망 즉 부러워하는 바람도 G선 위에 달빛임을 자각하고 사랑아, 눈물로 현을 매어 젖어 든 이 한 몸, 이라고 자신의 정서적 정황을 드러내 보인다. 심연에 첼로를 품고 살아가는 삶은 윤택하고 복된 일이다. 첼로의 음색은 바이올린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에 내면의 깊이를 더하는데 이만한 악기도 없을 것이다.

그는 또 ‘흙의 시간’을 통해 정감어린 삶을 구현하고 있다. 간밤에 고구마밭 산돼지 훑고 갈 때 울 엄마 뻔히 보고 얼마나 애태웠을까, 라면서 무덤가 하얀 개망초 그 이야기가 흐드러지고 있는 것을 유정한 눈으로 살핀다. 한갓진 수탉울음 목을 빼는 한나절 적막이 달아나다 구름 한 채 넘을 때 호미 끝 솔바람소리 목을 감다 흩어지고 있는 것도 본다. 귀 대면 흙의 숨결 자분자분 들려도 짧은 해 금세 돌아 어둠사리 쫓기어 노오란 달맞이 꽃대 선연할 쯤 하루를 편다. 사뭇 오종종한 시적 정황이 이어지면서 흙의 시간은 생명의 환희와 함께 하고 있다.

또 한 편을 더 보겠다. ‘실마리’다. 고향 집 장롱 속에 오래 익힌 반짇고리 골무와 실 몽당에 봉인된 시간이 깨어난다, 라면서 한 올의 실이 풀린다 기억 저편 뭉게구름이라고 추억을 포착해 그리움을 떠올리고 있다. 눈발이 희끗희끗 장독대에 날리는 날 구멍 난 양말들을 깁고 있는 백열전구 아래서 엄마는 천을 덧대며 언 발들을 녹였던 것을 아련히 기억한다. 어릴 적 기운 양말 더 따습다 달래며 신겨 주시던 꺼칠한 손 나일론에 스치던 소리 여전히 아프고, 에나멜 반고무신 등에 겨울나비 나폴 댄 날은 이제 까마득히 멀다. 시인은 이러한 정서를 육화하는 중에 삶의 진정성을 환기시킨다. 추억이 단순한 추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추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풀릴 길이 없는 코로나 시국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갑갑하고 답답한 시절이다. 우리가 무엇을 품고 이 난경을 헤쳐 나갈 수 있으랴? 얼마 전 제주 여행길에 어느 바닷가 찻집에서 40년 된 피아노 앞에 앉아 아는 멜로디를 잠깐 연주한 적이 있다. 연주라기보다 가볍게 두드린 것이지만 손이 기억하는 반세기 전 연습했던 곡을 통해 새로운 설렘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아침 비발디의 사계 중에 ‘겨울’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진정 시와 음악이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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