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 닳잖게 살살 가소/얼매나 더 산다꼬//잦바듬한 달이 간다 살 만큼 산 달이 간다/작년에 갈아 끼운 걸음으로 아득바득 가긴 간다//너저분 문자향을 공들여 염하고서/널브러진 서권기 오물오물 씹으면서/골목을 통째로 싣고 살 둥 죽을 둥 가긴 간다//참 서럽게 질긴 목숨이 등허리 휜 달빛을/닳고 닳은 달빛을 흘리지 않아, 시방//만월동/만월 수선소 일대가 무지로 깜깜하다

「경남신문」(2021. 1.1)

기별도 없이 늦가을이 들이닥쳤다. 또 온몸이 가렵다. 그렇게 새봄 앓이를 다시 시작했다. 이름하여 신춘이라는 병. 부재중 전화에 혹시나 해 걸어도 걸어도 다시 걸어도 통화 중이다. 피가 더 마르기 전에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광고다. 손이 울었다. 02-780-0000.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때가 되면 온다는 기별이 오시는가.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후보 허경영입니다. 존경하지는 않지만 이런 양반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욕이 나왔다. 사실 나는 ‘이런 양반’이 되고 싶었다. 하나쯤 있어도 괜찮은 다른 목소리의 양반, 아니 내 목소리라면 상놈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양반놈을 뽑겠는가. 한때는 주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빌고 또 빌어도 한 문장 발기하지 않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詩야! 습관처럼 절망하다, 욕하다, 포기할 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경남’이었다. 이 턱 저 턱 없다, 연락들 하지 마시라. 쓰기는 쓰되, 함부로 쓰지 말고 아껴 쓰자 새삼 다짐했으니까. 중언부언 지우고, 있어도 그만 빼고, 없어도 그만 버리면서 한 글자 두 글자 정말 아껴가며 딱 세 줄만 쓸 생각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상은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인 인천 거주 정두섭 시인의 당선 소감이다. 실로 당선작 ‘달의 뒤축’처럼 발언이 거침이 없다. 신인다운 패기와 결연한 의지가 쑥쑥 뿜어져 나온다. 모처럼 기대주가 나타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달의 뒤축’은 제목부터 눈길을 확 끈다. 무슨 노래일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독특한 수사와 활달한 언술 방식이 사뭇 역동적이다. 올해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중에 단연 으뜸이다. 첫수 초장은 굽 닳잖게 살살 가소, 라면서 얼매나 더 산다꼬, 그러느냐고 능청을 떤다. 입말 즉 정감어린 사투리로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잦바듬한 달이 간다 살 만큼 산 달이 간다, 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잦바듬한, 이라는 시어가 등장해 감칠맛을 내고 있다. 뒤로 자빠질 듯이 비스듬하게 기운 듯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 적절하게 쓰였다. 살 만큼 산 달은 작년에 갈아 끼운 걸음으로 아득바득 가긴 가고 있다. 가긴, 이라는 낱말을 통해 화자의 정황 즉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다. 너저분 문자향을 공들여 염하고서 널브러진 서권기 오물오물 씹으면서 골목을 통째로 싣고 살 둥 죽을 둥 가긴 가고 있다. 문향은 굳이 작가가 향기를 만들고자 애쓰지 않아도 문장에 담긴 정신과 사상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서권기는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이다. 화자는 문자향은 염하고 서권기는 오물거리며 씹는다. 이 대목에서 골목의 등장은 이 시편이 단순히 달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서민의 삶이 집약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달이 골목을 통째로 싣고 살 둥 죽을 둥 가는 정황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끝수에서 참 서럽게 질긴 목숨이 등허리 휜 달빛을 닳고 닳은 달빛을 흘리지 않아, 시방 만월동 만월 수선소 일대가 무지로 깜깜하다, 로 끝맺는다.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시사한다. 달은 곧 소시민의 초상이다.

정두섭 시인, 그는 그의 말대로 괜찮은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앞으로 크게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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