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리도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줘야 비로소 내 자리인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어느 누구나 책임을 떠맡을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만큼 성장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범위 내에서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답답한 노릇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자리와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경우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중요 현안이 해결될 때마다, 중앙정부의 예산을 확보했을 경우 정치인들이 내건 현수막을 통해서다.

지난해 8월 대구광역시 달성군 테크노폴리스가 ‘국가로봇테스트필드 혁신사업’ 부지로 선정됐을 때다. 이 사업은 2023년부터 2029년까지 7년에 걸쳐 총사업비 3천억 원을 투입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로봇데이터센터 및 테스트필드 구축과 서비스로봇 공통 기반기술 개발을 지원한다. 서울·부산·대구·광주·경남·충남 6개 광역단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대구가 선정되자 정치인들이 내건 현수막이 대구를 뒤덮었다. 국회의원 뿐 아니라 군의원, 시의원들까지 나서서 자기가 유치한 양 홍보를 했다. 때론 다음 선거에 출마 예정인 예비정치인들이 가세하기도 한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불거진 일은 아니지만 국회의원이 도비확보를 내세워 홍보를 했다가 도의원과 갈등을 빚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도 예산 확보는 도의원들이 하는 역할임에도 국회의원이 ‘내가 예산을 따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이 과연 자리에 맞는 역할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풍경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매년 12월이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예산 국회가 끝나자마자 이를 자기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해서 홍보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린다. 가끔 현수막에 얼굴사진까지 넣어 생색을 내는 경우도 있다. 똑같은 예산을 두고 서로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당의원, 야당의원 구분도 없다.

지난해 12월 초, 2022년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어김없이 생색내기용 현수막이 대구 곳곳 눈에 잘 띄는 곳에 내걸렸다. 당시에 대구 어느 지역 국회의원이 내건 현수막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 사업에 국비 2억 원을 확보했습니다.’ 보는 사람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어떻게 국회의원이 2천억 원도 아니고 국비 2억 원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현수막까지 내걸 수 있나 싶었다. 과연 그 자리, 그 지위에 맞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각 당의 대선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공약을 내놨다. 대중골프장 회원제식 운영 근절 공약도 발표했다. 이 공약이 탈모 관련 커뮤니티에서 호응을 일으키자 민주당은 ‘대박’이라며 잔뜩 고무된 표정이다. ‘모(毛)퓰리즘’이란 비판에 ‘생활 밀착형 공약’이라고 강조한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도 작은 공약을 내놓는 중이다. 음주운전 예방에 주류세를 활용하겠다는 것과 전기차 충전요금 동결도 약속했다.

하지만 대통령후보들이 생활공약을 쏟아내며 유권자들의 ‘이익투표’ 심리를 건드려 표를 얻으려는 의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후보들의 꿈이 왜 이렇게 소박한 것일까.

물론 대선후보라고 해서 신항만을 짓겠다거나 고속철도를 건설하겠다는 등의 굵직한 SOS관련 공약들만 내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대통령 후보라면 최소한 당면현안인 경제성장과 지역균형발전 등 한국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미래비전을 먼저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런 미래담론조차 제대로 없기 때문에 ‘소확행 공약’에 매달리는 것이라면 정말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다. 국민들은 대통령후보라는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생활 공약만 내놓는다면 이 분들이 과연 얼마나 고민을 하고 발표할까, 혹 그냥 이런저런 공약을 나열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국민들은 이렇게 꿈이 소박한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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