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논하지 말라/ 레코드판보다 촘촘한 실금의 나이테/ 그 아득한 연륜(年輪) 앞에서 우린/ 얌전해져야 한다// 울향 앞에서는/ 역사를 논하지 말라/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몸에다/ 적어놓은, 이보다 더 감동적인 책은 없느니// 물결에 바람결에 다듬고 꿈결에 채워 온/ 저 수줍게 내보이는 하얀/ 숫처녀의 속살/ 한 줌 흙과 물먹은 바람만으로 천년을 살아온/ 삼베 무명실보다도 질긴 삶이 바로/ 여기에 있더라// 아! 울향 앞에서는/ 향기를 논하지 말라/ 설부화용(雪膚花容)의 자태로/ 숨소리 고르면서 기다려 온/ 신방의 이불깃 냄새가 나지 않는가// 울향 앞에서는/ 삶의 자세도 숙연해야 한다/ 나무도 사람도 잘 살아야 향이 나는 것이다/ 생명체의 연소는 분신인 것이다// 천심절벽(千尋絶壁) 외진 곳에서/ 오직 한마음으로 푸르른,/ 그 절개를 배워야 한다/ 울향 앞에서.

「솔뫼」 (솔뫼문학회, 2021)

화산섬인 울릉도의 바위틈에 뿌리내려 생장한 향나무를 ‘울향’이라고 한다. 바위 틈새에서 자란다고 ‘석향’이라고도 불린다. 울향은 척박한 바위 틈새에서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를 버티고 견뎌낸 강인한 나무다. 울릉도의 바닷바람과 폭설은 유별나다. 극한의 고난과 뼈를 깎는 시련을 극복한 나무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잘 안다. 나뭇결이 곱고 그 향기가 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하고 은은한 절세의 향은 혹독한 대가의 산물이고 끝없는 수련 끝에 거둔 득도의 표징이다.

울향은 극심한 시련에 단련된 까닭에 쑥쑥 웃자랄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얕볼 일이 아니다. 단단하고 치밀하며 알차다. 울향은 작아도 결코 어리지 않다. 겉모양만 보고 연륜을 오판하는 일일랑 말아야 한다. 오랜 세월 살아온 만큼 울향은 그 자체 살아있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천체의 운행과 자연의 변이를 몸으로 겪고 이를 체화한 터, 역사책과 다르지 않다. 역사 앞에 지혜를 얻으려면 울향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도를 닦듯이 천년을 살아온 삶이다. 소식으로 몸피를 줄이고 이슬을 먹고산다는 각오로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삭여왔다.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명줄을 이어왔다. 생명에 대한 애착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어금니를 깨물고 악착같이 살아온 결정체가 바로 울향이다. 순탄하고 포시러운 환경에서 자란 나무가 진주 같은 보석을 보듬은 채 신비로운 향내를 뿜어낼 순 없다. 울향은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에서 나는 그윽한 선향이자 신방의 파릇한 이불깃에서 풍기는 은은하고 부드러우며 정결한 향이다.

나무든 사람이든 먹고 숨 쉬는 것이 정갈하고 맑아야 향내를 간직한다. 빼어난 향내는 그 진솔한 삶에서 우러나온 생명의 정수다. 울향의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절로 숙연해지고 공경하는 마음마저 은근히 솟아난다. 하물며 그 몸을 불살라 발산하는 향기는 더 말해 무엇 하랴. 울향을 피우면 천년을 산 고고한 삶의 정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울향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천길 깊은 낭떠러지 바위틈에서 홀로 생존하는 울향은 소나무의 푸른 절개를 능가한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추위가 닥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게 시듦을 안다)라는 말도 울향 앞에선 오히려 빛이 바랜다. 울향을 닮고 싶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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