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하다 문득, 양손을/ 관 밖에 내보이며 간 알렉산더 대왕을 생각한다/ 베어도, 베어내도 다시 돋아나는 아까시나무가/ 무덤의 늑골 속에서 뻗어 나와/ 알렉산더 대왕의 손처럼 내밀고 있다/ 무덤이 내미는 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가시만 움켜쥔 빈손이/ 낫을 쥔 나의 손과 맞서서/ 급소를 노리고 있다/ 저승에서 다시 손으로 거머쥔 것은/ 부드러운 바람의 노래가 아니라/ 이승의 삶에서 익힌 빳빳한 독기였던가/ 찔릴수록 더욱 모질게 도려내는 내 손과/ 낫날이 속살을 파고들수록/ 더욱 파랗게 독기를 내뿜는 무덤의 손,/ 내미는 족족 베어지는 손이지만/ 그 빈손의 뿌리는/ 까마득한 흙속에 숨어 독한 가시를 키우고 있다/ 이승의 손으로는 도저히 베어낼 수 없는/ 가시의 뿌리가/ 내 생의 한쪽을 깊숙이 찔러온다

「가시」 (화니콤, 2011)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은 생전에 이룬 그의 업적만큼이나 인구에 회자된다. 관의 양쪽 옆에 구멍을 뚫어 양손을 관 바깥쪽으로 내 놓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위대한 정복자라도 죽을 땐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뭇사람들과 후세에게 보여주자는 의도일 터다. 그의 최종 무덤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의 것이라고 고증된 무덤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유언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할 순 없다. 다만, 알렉산더 대왕의 관에 관한 이야기는 ‘공수래공수거’의 유럽 버전임에 틀림없다.

무덤 속에서 뻗어 나온 아까시나무 모습을 보고 알렉산더 대왕의 관 이야기를 생각한다. 무덤 속에서 내민 아까시나무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다. 그것은 무덤에 묻힌 사자가 생전에 아무리 권세가 대단했다손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듯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며 인류문명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알렉산더 대왕마저도 빈손으로 떠났으니 범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허나 아까시나무의 교훈은 잠시 뿐, 이승의 손은 낫을 움켜쥐고 나무둥치를 내리찍는다.

낫을 들고 뿌리까지 과감히 도려내고자 하나 아까시나무도 만만찮다. 뿌리까지 완전히 근절하지 않으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까시나무의 생명력은 너무 끈질겨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시만 움켜진 빈손이지만 흙속에 묻혀 독기만 키운 것인지, 잘라도 잘라내도 끝없이 또 손을 내민다. 이승의 손이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낫을 들고 급소를 내리찍는다. 이승을 떠나도 독기를 버리지 못한 까닭일까, 아니면 발본색원하고자 악착같이 낫을 들고 내리찍는 이승의 손이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탓일까.

앎과 실천은 별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이치를 번연히 알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재물이란 살아있을 때 적당히 필요할 뿐이지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저승 갈 때 싸서 메고 가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탐하는 경향이 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해 번민하고 괴로워하며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분수에 맞지 않은 큰 집을 원하는 건 아닌지, 좋은 옷에 과하게 집착하는 건 아닌지, 너무 음식을 탐하는 건 아닌지, 아까시나무와의 다툼을 지켜보자니 재물을 쌓아놓고도 남의 주머니를 노리는 우리네 인생이 부끄럽다. 시를 읽다가 가슴이 뜨끔해지는 까닭이다. ‘가시의 뿌리가 내 생의 한쪽을 깊숙이 찔러온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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