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그 오랜 병상/이현정

발행일 2021-11-30 10:57:4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조가비 다문 입이 희미하게 들렸다/음울이 녹진녹진한 생사의 가장자리/고통은 습관이지만 매일같이 또렷했다//내게도 뚝딱 뱉을 재주가 있었다면/속 깊이 들어와 살점 아래 자리 잡은/끝끝내 거르지 못한 마지막 모래 한 알//흰 살로 덮고 묻어 바래지는 이 불순물/금속보다 단단한 그 무엇이 되려는지/치열한 자가 면역에도 임계점이 다가오고//죽지 못해 참아온 몽니를 도려낸 날/다시 입을 닫으려다 스미어 나온 단말마,/이제는 그만 아프고 싶어/한 점의 티끌도 없이

「시조시학」(2020, 여름호)

이현정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18년 등단했다. 시조 창작과 더불어 동시조 쓰기에도 매진하고 있다.

‘진주, 그 오랜 병상’은 제목에서 보듯 진주에 대한 역발상을 보인다. 특히 병상이라고 본 점이 인상적이다. 그렇지, 병상이 맞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짧은 기간이 아니다. 오랜 인고의 병상인 셈이다. 그래서 화자는 조가비 다문 입이 희미하게 들렸다, 라고 조심스레 정황을 알리고 있다. 그것은 음울이 녹진녹진한 생사의 가장자리여서 고통은 습관이지만 매일같이 또렷했다, 라고 진술한다. 그런 후 화자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게도 뚝딱 뱉을 재주가 있었다면 속 깊이 들어와 살점 아래 자리 잡은 끝끝내 거르지 못한 마지막 모래 한 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흰 살로 덮고 묻어 바래지는 이 불순물이 금속보다 단단한 그 무엇이 되려는지 치열한 자가 면역에도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밝힌다. 임계점은 저온에서 고온으로 변화를 할 때 저온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한계 온도와 압력을 뜻한다. 그 지점이 눈앞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죽지 못해 참아온 몽니를 도려낸 날 다시 입을 닫으려다 스미어 나온 단말마는 다름 아닌 이제는 그만 아프고 싶어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라는 독백이다. 오랜 병상에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었기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그렇기에 단말마가 터져 나온 것이다.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고통을 겪은 화자는 고통을 끝내고 한 점의 티끌도 없는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진주, 그 오랜 병상’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시선에서 비롯된 육화 과정을 통해 간단치 않은 삶의 역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공전1-조각달에게’에서 보다 개성적인 목소리를 들려준다. 공전은 한 천체가 다른 천체의 둘레를 주기적으로 도는 것을 말한다. 화자는 공전 중에도 달의 조각달에 대한 사유를 서정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 밤은 하필이면 졸음도 갸울대요, 라면서 거시기 눈 비비며 부여잡은 소매의 끝 아직 다 보여주지 않은 당신의 온 얼굴이 낮이 되면 왜 그리 꿈처럼 희미할까요, 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암탉은 알 품을 때 몸집을 부풀린다며 당신은 무얼 품느라 아스라이 부풀리는지 또 묻는다. 끝수는 더욱 미묘하다. 날빛이 들리면 아직은 멀었대요, 라면서 나에게 조금만 더 보여주지 않기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한 자락만 내어주기를 간청한다. 아련한 사랑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또 ‘공전 3-그믐에 부쳐’에서 한숨이 보인다면 저렇게 하얄 것이다, 미련을 벼린다면 저렇게 날 설 것이다, 라고 그믐달의 외양을 통해 한숨과 미련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일은 당연히 공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연작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구인 종장에서 간절함 그예 비추면 저리 무진장 서러울 것이다, 를 통해 설움의 깊은 파장을 말하고 있다. 생이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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