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40>성덕왕

발행일 2021-11-22 09:30: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귀족 입김으로 성덕왕이 태자 폐위

폐위된 태자는 중국 망명 후 지장보살이 돼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릉은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간 외곽지역에 있다. 다행히도 묘역이 호석과 석상 등의 구조물로 잘 다듬어져 사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신라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엄청나게 넓어진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어려움과 백제와 고구려 잔존 세력들이 일으키는 곳곳에서의 전투 및 내부적인 반란 등으로 내정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문무왕의 위업을 이어받은 신문왕은 가장 먼저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을 잠재우는데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내전은 물론 반란의 여식이 되어버린 왕후를 몰아내고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는 과정도 힘겨웠다.

이런 과정에서 귀족들의 파벌싸움은 내적으로 깊은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왕권의 불안정 상태가 계속됐다.

역사 기록은 신문왕 이후 아들 이홍이 7세 어린 나이에 효소왕으로 왕위를 이어 692년부터 702년까지 10년간 왕좌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또 효소왕이 17세에 죽자 동생 흥광이 13세에 왕위를 이어 성덕왕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덕왕은 702년부터 737년까지 3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특별한 공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성덕왕이 죽고 아들 승경이 34대 효성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즉위 5년 만에 병들어 죽었다. 이어 효성왕의 동생 헌영이 35대 경덕왕으로 즉위해 23년간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축하는 등 문화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있어 통일신라 최고 절정의 시대를 맞았다.

문무왕 이후 31대 신문왕부터 35대 경덕왕까지 5명의 왕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은 역사서에는 아무런 충돌없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보이지만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곳곳에서 왕권을 둘러싼 소요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덕왕릉의 남쪽 300여m 지점에 성덕왕 기념비를 세웠던 비석 받침 귀부가 1천 년이 지나는 동안 색상도 변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다.


◆구화산의 지장보살

성덕왕은 형인 효소왕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치적 세력들의 입김에 힘입어 33대 왕으로 즉위했다. 성덕왕도 정치적 실권을 잡은 김순원의 강압에 의해 성정왕후를 폐하고 김순원의 딸을 소덕왕후로 맞이했다.

이어 성덕왕은 폐위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김중경을 태자로 봉하고 있었지만 김순원의 노골적인 실력행사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아무도 모르게 중경을 중국으로 도망하게 했다.

승려로 위장한 태자 중경은 호위무사들의 눈먼 호위를 받아가며 김순원의 병사들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중국 구화산으로 무사히 도망하게 된 태자는 그만 불도의 공부에 깊숙이 빠져버렸다.

성덕왕의 형 효소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10년간 재위해 있었지만 마땅한 업적을 기록한 것이 없다. 성덕왕릉과 나란히 낮은 임야에 위치해 있다.


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고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교를 공부하고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다. 중국 각처에서 공부가 깊어진 김교각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군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화성사는 성지가 됐다.

김교각은 신라에서 차씨를 가지고 가 구화산에 번식시키며 차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보살은 중국에서도 왕족으로 알려지고 있는, 신라가 낳은 유명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기념하거나 추념하는 등의 행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김교각을 마치 살아있는 부처님 모시듯 하고 있다.

호석과 인근 조경이 뛰어난 신문왕릉.


◆신문왕의 후예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걱정이 많았다. 백제와 고구려의 잔존병사들이 도발하면서 잦은 전쟁을 해야 했다. 또 평생 전우이자 연정으로 경쟁해온 김흠돌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왕실에 혼란을 불러올 것 같아 불안했다.

문무왕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김흠돌 장군의 움직임에 걱정이 컸다. 병권의 1/3이나 거머쥐고 있는 김흠돌 장군이 모반의 뜻을 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는 순식간에 피바다에 잠길 것이 뻔하게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심증만을 가지고 나라일에 목숨을 바치는 척하는 장군을 잡아 가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으면 용이 돼 동해바다를 지킬 터이니 동해 앞바다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며 “왕좌는 한시라도 비워두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으니 내 관 앞에서 즉위식을 갖도록 하라”고 명했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동해안 가까운 곳에 지은 감은사. 감은사의 동서 양쪽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왕의 유지에 따라 정명은 아비의 주검 앞에서 왕관을 썼다. 그리고 화장해 동해 앞바다에 장례를 치렀다. 신문왕은 국상 중에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는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장군들에게 명해 김흠돌 세력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바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신문왕은 반란의 수괴 김흠돌 일당을 거사 하루 전에 모조리 잡아들였다. 왕은 장인어른이지만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김흠돌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 반란군의 딸인 왕비도 폐비하고, 왕궁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태자로 임명한 보천태자와 태자의 동생 효명왕자는 신문왕이 끔찍이 사랑하면서 곁에 뒀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어머니가 쫓겨나고 외할아버지가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마음을 졸여야 했다.

신문왕이 김흠운의 여식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새 왕비가 아들을 낳자 태자 형제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새왕비의 친인척들이 왕실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태자 형제들에게 가하는 압박도 점차 수위가 높아지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문왕은 새로 맞은 왕비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보천태자를 폐하고, 세 살 난 왕비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신문왕은 수시로 폐비가 낳은 아들 형제를 불러 근황을 물으며 걱정하곤 했지만 두 아들은 왕비 측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한 미련도 진작 버리고 싶었다. 형제들은 권력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도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산으로 숨어들어 부처님에게 귀의하려고 했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스스로 외부군부에 나갈 것을 청했다. 왕은 못 이기는 척 형제들을 가까운 성에서 근무할 수 있게 인사조서에 명을 내렸다. 두 형제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강원도 지역을 순찰하던 중 군사들 모르게 오대산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는 수모를 잊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아비가 처형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가슴을 저몄다. 또한 궁궐의 두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수모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

폐비는 궁궐에서 손이 닿지 않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군사를 길렀다.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윤홍 장군이 주축이 되어 흩어졌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규합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경주 낭산 탑동에 위치한 삼층석탑.


보천과 효명태자 형제는 신문왕 말기에 훈련을 핑계로 강원지역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해후했다. 두 태자의 어머니 폐비는 신문왕이 죽기 직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보천과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으로 들어온 지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왕이 죽고,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에게서 난 이홍이 효소왕으로 즉위했다.

윤홍 장군은 효소왕이 어렸지만 신문왕이 심어놓은 세력들이 궁궐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어 그들의 힘이 흩어진 702년에 거사를 일으켜 성공했다.

신문왕의 큰 아들 보천은 이미 권력에 욕심을 버리고 불법에 귀화했다. 둘째 효명태자가 윤홍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로 입성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이다.

◆성덕왕의 고민

성덕왕은 윤홍 장군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지만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한이 서린 절규를 떨칠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불법을 공부하며 수련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세상사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식들이 되풀이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성덕왕은 왕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왕좌에 오르는 일도, 자신의 왕위를 이을 후계구도를 정하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현실이 더욱 심사를 어지럽게 했다.

중국 구화산의 지징보살이 된 성덕왕의 큰아들로 전하는 김교각의 보살상. 중국에서 김교각 열반 100주년을 기념해 조성한 보살상을 가져와 동국대 경주캠퍼스 본관에 전시되고 있다.


귀족들이 세력다툼을 하며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갈아 치우고, 태자의 신분조차 왕의 뜻으로 지킬 수 없게 했다.

왕이 왕 노릇을 할 수가 없었던 신라시대 정권의 흐름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통일신라 초기는 물론 1천 년의 사직이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전통처럼 이어졌다. 진평왕과 원성왕 등 몇몇 전제군주로 군림했던 왕의 시대가 잠시 있었다는 정도로 요약될 뿐이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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