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24절기 중 20번째가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소설(小雪)이 찾아왔다. 곱게 물들어 코로나로 지친 소시민들을 위로했다는 단풍도 이젠 미련을 내려놓고 사뿐히 날린다. 꽃보다 더 곱고 예쁜 단풍을 보겠다며 나섰던 팔공산에는 마지막 남은 잎새들만 바람에 오르르 떨고 있다. 추억을 더듬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걱정 없이 따스한 마음으로 지내라고 단풍이 인사를 하는 듯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날이 찾아들 테지만, 빨간 단풍과 노란 은행잎을 기억하며 좋은 날을 기다려야지.

큰 일교차로 사계절용 옷을 준비해 단단히 껴입고 나가서 낮에는 반 팔 차림새로 해가 지면 코트를 걸치고 완벽하게 대비했다는 이들도 콜록대며 찾아온다. 코로나 백신과 더불어 독감 예방 접종도 했지만, 기침만 하면 주위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려 죄인이 된 느낌이라며 슬픈 표정이다. 수능이 끝나고 논술고사를 봐야 하는 수험생들도 아픈 몸보다 행여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서, 혹시 코로나에 걸려 다른 이들을 감염시킬까 봐서 걱정부터 앞선다는 이야기다. 중요 시험을 앞두고 심신의 안정이 우선 돼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코로나를 2년째나 겪으면서 수험 준비하고도 또다시 걱정이 끝나지 않는구나 싶어서 더 안쓰럽다.

잔뜩 흐린 날씨다. 눈이라도 내릴 듯하다. 입동과 대설 사이의 소설이니 어쩌면 눈도 낯설지 않을 때이다. 땅이 얼기 시작하고 살얼음이 끼이며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 바람의 차가움을 느끼다 보니 마음은 벌써 여름이 그립다. 뜨겁던 여름에 병원 개원 준비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더위가 언제 물러갈 수는 있을까 싶었다.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정신없이 준비하던 그때가 벌써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더위가 추위로 변해간다. 열어 놓은 날들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한 주의 시작인가 싶으면 어느새 주말을 맞이한다. 삶의 속도가 정말 가속페달을 밟은 듯 마구 달려간다. 하루를 뒤돌아보고 되새겨볼 겨를도 없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즐거운 나날이라 생각해야 할까.

날마다 찾아오는 아이들을 맞으며 순간순간 그들에게 집중하리라 마음먹는다. 많이 고민하다가 찾아왔을 부모와 아이들, 그들의 키에 대한 고민, 성조숙에 대한 우려 사항을 귀 기울여 들으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진료를 하리라 다짐한다.

더러는 안 자라서. 또는 너무 많이 먹고 체중이 많이 나가서, 혹자는 성조숙증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을 맞으며 기본적으로 신경 써야 할 영양 섭취와 정상적인 발달의 과정을 아이와 가족에게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아이들의 이차성징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고환 측정기를 사용한다. 책상 위에 놓인 그 고환 측정기를 보던 아이는 손에 들어보고 만져보더니 머리에도 대보고 목에도 걸어보고 손목에도 걸어본다. 변성기까지 접어든 청소년인 아이가 너무나 신기한 표정으로 천진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기에 아이와 아빠에게 퀴즈라면서 알아 맞춰보라고 했다. 남자에게만 필요한 도구이다. 사춘기 검사에 필요한 도구다. 굉장히 소중한 것을 측정해보는 것이다. 그러자 아이 아빠는 묵주? 염주? 종교적인 보물이 아닌가요? 하고 아이는 소중한 것이라고 하니 드디어 알았다면서 반색한다. 무엇이냐 물으니. “비엔나”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 이런 보물이 어디에 있었던가? 의외의 대답에 기억을 더듬으며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아이가 그사이에 설명을 붙인다. 병원에 오기 전에 점심시간에 급식으로 나온 비엔나가 꼭 이것과 같았다면서 먹어보고 싶다는 표정까지 짓는다. 고환 측정계는 작은 타원형의 모형이 크기별로 엮여있다. 1부터 25까지의 숫자가 쓰여있다. 1은 1㎖의 부피이다. 1에서 3까지는 사춘기 이전의 고환 크기이고 4로 접어들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점점 크기가 커져 고환의 크기가 14㎖ 정도 되면 몽정할 정도로 성숙한 것이다. 어른은 25에 해당하는 고환의 크기를 재는 측정기구를 맛있게 먹은 비엔나로 여기다니. 너무도 천진무구한 모습에 사춘기가 빨라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던 아이 엄마도, 염주를 떠올리며 답을 찾던 소년의 아빠도 나의 설명을 듣고는 아이를 껴안고 한참 웃는다.

발음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겨울 매서운 추위가 찾아올지라도 따사로운 햇살 같은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것 만으로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어르신들은 흔히 ‘소춘’이라고 부르시기도 한다는 소설이 찾아왔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겨울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정성스레 키운 배추로 김장을 하고 내년 봄을 위해 보리도 심고 밀과 마늘을 심어 두리라. 바람 불고 추운 겨울이 찾아오더라도 첫눈이 내리는 날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풍성하게 나누며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겨보리라. 엉뚱한 비엔나로 박장대소하던 날들도 떠올리면서.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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