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 시인

곡란골에는 사람보다 더 오래 마을을 지키며 마을 사람들의 태어남과 죽음을 지켜보고, 좀 더 세세하게는 아이들이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마을을 떠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그 순환의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라 늙고 죽는 생과 사의 순환마저도 무연하게 지켜보았다. 어떤 이들은 수백년 동안 묵묵히 지켜 보며 세월의 풍파를 견딘 것들도 있다. 새로 태어나거나 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들과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수백년은 족히 된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가을이 되자 나무는 검붉은 단풍이 든 나뭇잎을 숲에 떨어뜨리며 겨울 채비를 하기 시작했고, 앙상한 줄기가 드러나자 언제부터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없는 까치둥지도 함께 드러났다. 그 느티나무 아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더운 여름을 보냈던 정자도 한 채 있는데 거기에는 자주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가끔 산책길에 그 정자에 가면 바람이 가져놓은 먼지가 묻은 바둑판이 구석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 뿐이겠는가, 느티나무는 그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이미 예언자가 돼 사람들은 나무 둘레에 금줄을 치고 때가 되면 동제를 지내곤 한다. 술과 음식을 올리는 제상이 나무 앞에 놓여 있는데 나무에 깃든 영혼의 예언자는 마을의 수호신이 돼 길흉화복을 점치며 액운을 물리치곤 할 것이다. 간혹 예의없는 사람이 마을의 제사를 받아먹는 금줄 친 느티나무 아래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지 나무 근처에는 나무에게 예의를 차려줄 것을 부탁하는 현수막도 하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 아래를 지날 적에는 조용조용 지나거나 피곤해도 다른 나무 아래에서 쉬곤 한다. 나무는 마을의 액운도 막아 주지만 때로는 동티도 내리곤 하기 때문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흘러가는 개울이 있다. 개울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연기념물인 수달을 비롯해 삵이나 왜가리, 고니, 청둥오리들이 산다. 나는 주로 이 개울 양쪽으로 나 있는 농로를 따라 산책을 즐기는데 한가로이 고기를 잡던 잿빛 고니나 왜가리가 기척에 놀라 후다닥 날아 오를 때는 살짝 미안해진다. 항상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 우리 집 개들은 놀란 새들이 날아오를 때면 덩달아 흥분해서 풀쩍풀쩍 뛰곤 하지만 날아가는 새를 어찌 잡을 것인가. 가끔 검은 몸집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민첩한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수달은 그 긴 개울 어디서든 나타난다. 곡란골의 생명체들은 주로 이 개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거기에는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물고기들이 있을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생명체들이 갈대와 부들이 가득한 물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건너편 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고라니가 농로를 걷고 있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나도 놀라고 고라니도 놀라서 후다닥 달아난다. 그러나 이미 나는 고라니가 달아나지 않더라도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 마을에 거처를 정한 후 밤마다 고라니 울음소리를 들으며 지냈기 때문에 이미 고라니는 앞산이나 뒷산 어디에고 흔하디 흔한 짐승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라니는 다만 저 혼자 놀라서 뛰어 다닐 뿐이다.

도시에서 살 때 나는 오직 사람에게만 신경을 썼고, 사람만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도시에서 비켜나 있어 사람이 없는 곳에 존재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곡란골에 들면서 나는 가장 먼저 마을을 지키는 오래된 느티나무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고, 개울에 사는 모든 짐승들과 수백년은 족히 대를 이어 살아왔을 풀들이 나와 다름없는 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 생명이 하나인 것처럼 그들의 생명도 하나인 바, 거창하게 공존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한다. 고라니가 밭의 상추를 뜯어 먹거나, 새들이 논의 나락을 쪼아 먹거나, 갈대나 부들이 무성하게 개울을 채우거나, 산돼지가 밭을 헤집어 놓는다 해도 “우짜겠노. 그들도 살아야 안되겠나” 라며 체념한다. 그 체념에는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이 깊이 스며 있다.

천영애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