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인가 싶어 깨어 보니 노도에 눈 내린다/태속 같이 보드라운 눈밭 얼굴을 파묻으면/주름살 깊은 어머니 내 눈가에 선명하다//먼 길 노 젓다 돌아오는 쪽배인 양/그리움 몰아치다 파도 위로 사라지면/갯바위 조가비처럼 적셔드는 흰 적설//이른 새벽 깨어나 필묵 들어 시를 쓴다/사록은 등불 속에 시절 없이 흔들리고/뇌리에 지난 생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돌아보면 내게 있어 한갓 생은 꿈이었네/말 잃고 벼슬 잃은 유폐의 날들을 생각하니/금강경 한 줄 공처럼 내 무심에 젖어든다//인간사 부질없음을 단 하룻밤에 깨달아/눈 감은 눈 감은 듯 써 내려간 일필휘지여/내 미처 어찌 몰랐을까 이생이 한갓 꿈임을//산마루에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니/흰 눈은 내려 앉아 백발의 내 몸을 덮고/손에 든 서책에 쌓이는 왕조의 시름이여//희빈의 치마폭 왕 그 또한 내 님이거늘/오교에서 기울던 술잔 지금도 생각나네/님 계신 그곳을 떠나 홀로 달랜 사년이여//반생을 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네/노도에 맺힌 한이 한 생각에 풀어지고/그대가 품고 있던 경 또한 모두 꿈인 것을//찢어진 가슴 씻고 나니 이곳이 어디인가/통한은 마르다 못해 한지에 스며들고/이 한 몸 망부석 되어 만리 서포를 지키네//자나 깨나 품속에 금강경을 품었더니/내가 겪은 세상이 아홉 개의 허공이었네/손들어 잡아보아도 그냥 그저 구름이었네

「정형시학」(2020, 겨울호)

정성욱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1978년 무크지 ‘지평’과 ‘시힘’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988년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남도행’이 있다.

시의 화자는 ‘구운몽, 그 꿈에 대한 유폐의 시’라는 제목과 부제 ‘김만중 아홉 개의 꿈’을 통해 어쩌면 꿈이 제한돼 있는 시대에 더 많은 꿈을 꿀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이 한글이다. 김만중은 국문가사예찬론을 펼친 선구자로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로 시문을 짓는다면 이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우리말을 사랑했고, 김시습과 허균 등과 함께 한국 중세 소설문학의 흐름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만년에 김만중은 남해 노도에 유배돼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조 ‘구운몽, 그 꿈에 대한 유폐의 시’는 무려 10수나 되는 호흡이 긴 작품이다. 김만중이 시 속의 화자가 돼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내는 역정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세하다. 노도의 눈, 보드라운 눈밭, 주름살 깊은 어머니, 먼 길 노 젓다 돌아오는 쪽배, 파도, 흰 적설, 이른 새벽의 시, 사록, 지난 생들의 허공, 생은 꿈, 말 잃고 벼슬 잃은 유폐의 날들, 금강경 한 줄, 인간사 부질없음, 써 내려간 일필휘지, 한갓 꿈, 백발의 몸, 서책에 쌓이는 왕조의 시름, 희빈의 치마폭 왕, 오교에서 기울던 술잔, 노도 맺힌 한, 찢어진 가슴, 통한, 한 몸 망부석, 만리 서포, 품속의 금강경, 아홉 개의 허공, 그냥 그저 구름이라는 이미지들이 연첩되면서 서포의 일대기를 그려나간다. 그는 무엇보다 상상력의 마술을 부릴 줄 알았던 작가이자 유교가 득세하던 때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판타지를 동원해 스토리를 만들어낸 소설가였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과연 오늘날 시조를 쓰는 이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정신을 작품에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운몽, 그 꿈에 대한 유폐의 시’를 읽으며 올곧은 현실의식 즉 당대의 여러 민감한 사안을 시조로 녹여내는데 힘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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