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에 쌓아놓은// 화산암 뚫린/ 구멍마다// 어둠이 찼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눈 코 입/ 퀭한 얼굴 같다// 한나절 화단에 앉아// 한바탕 소나기나/ 기다린다// 실컷/ 울어나 볼까// 구멍 숭숭// 돌의 눈에서 흐를 눈물/ 돌의 뺨으로 죽을 저녁// 달이 떠// 하얀 얼굴을 가져간다

「지는 꽃에게 말 걸지 마라」 (학이사, 2020)

고즈넉한 늦가을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나는 날이다. 겨울 소식을 전하려는 듯 찬바람이 불어와 낙엽을 떨구고 간다. 화초는 몸피를 최대한 말아 넣고 동장군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석류나무, 앵두나무도 잔뜩 움츠린 채 월동준비에 여념이 없다. 소일 삼아 농작물을 경작하던 텃밭은 거무튀튀한 속살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있다. 두서없이 갖다놓은 수석이 멋쩍은 듯 먼 산을 본다. 화단 경계석은 검은 화산암,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다. 화단 빈자리에 제법 큰 현무암이 놓여있다. 화단으로 나와 어슬렁거리다가 화단 빈자리를 차지한 검은 바윗돌에 털썩 걸터앉는다.

구멍 뚫린 못생긴 검은 바윗돌이 왠지 만만해 오다가다 하릴없이 치대곤 한다. 찬찬히 뜯어보면 늘 보던 얼굴 같기도 하다. 뚫린 구멍마다 기막힌 사연이 가득 찬 듯하다.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귀기울이다보면 지나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만감이 교차한다. 수많은 곡절과 모진 풍파와 힘겨웠던 시련이 구멍 속에 숨죽여 엎드리고 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부지런히 받아냈다. ‘화산암 뚫린 구멍마다 어둠이 찼다.’ 그러고 보니 어두운 표정에 이목구비가 퀭하다. 시인의 얼굴이다.

기억의 바다를 끝없이 항해하다 보면 정신 줄을 놓기 십상이다. 시간을 잊고 만다. 잠시 턱을 괸 것 뿐인데 눈 깜박 할 사이에 벌써 한나절이 훅 지나간 모양이다. 가슴이 갑갑하고 목이 마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길 기다려 본다. 만추에 소나기라니 참 뜬금없고 부질없는 망상이다. 실컷 울어나 보면 시원해 질려나. 나이 들면 주책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다. 그렇지만 주책이면 어떠랴. 울고 싶을 때 맘껏 울어보는 거지.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고 어쩌면 만년의 특권일지 모른다.

바윗돌에 난 수많은 구멍들은 근심 걱정으로 뻥 뚫린 마음의 표상이고 돌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더덕더덕 말라붙은 지라 피부는 사포보다 더 거칠다. 고난 속에서 가난을 지고 역경 속으로 뛰어온 삶이 가슴에 사무친다. 험한 세상 백팔번뇌로 속이 까맣게 타버린 탓에 얼굴마저 검게 굳어버렸다. 고슴도치보다 더 거친 뺨, 검은 얼굴로 노을을 맞는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해가 지면 어둠이 몰려올 터, 그렇게 삶이 끝나는 걸까.

해는 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나 그렇다고 암흑은 아니다. 하늘에 뜬 달과 별이 어둠을 밝혀주는 까닭이다. 해가 진 하늘은 빛나는 별들의 향연으로 화려하다. 현무암의 어두운 구멍들이 별이 된 걸까. 황무지처럼 거친 피부 대신 매끈하고 뽀얀 모습이 복스럽다. 눈 코 입 퀭한 까만 얼굴은 잊어버려라. 꿈과 희망에 부풀어 오른 달덩이가 하얀 얼굴로 미소 짓는다. 고난과 역경을 묵히고 삭히면 곰삭은 맛으로 거듭난다. 배곯고 고통스러웠던 가난과 견뎌내기 힘겨웠던 도전을 극복하면 ‘별처럼 빛나고’ ‘보름달처럼 넉넉한’ 날들이 기다리는 터이다. 검은 얼굴일랑 돌려주고 하얀 얼굴을 가져간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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