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윤진모 ‘봉할매’

발행일 2021-11-24 17: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어디서 불길이 치솟는가. 온 나라가 폭염으로 용광로인 양 달아오른다. 한여름 땡볕을 이고 군위 승목산 봉수대 입구에 다다랐다.

직경 한 팔 정도는 됨직한 구덩이가 먼저 눈인사를 한다. 농구공만 한 크기의 네모난 돌들이 손을 맞잡고 둥그렇게 앉아있다. 석축 위로 올라섰다.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이 우물이나 뒷간처럼 보인다. 몇 가지 확인하고자 ‘불길 순례’의 저자 운봉 선생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물 같은 걸 찾았다고 하니 그게 아니란다. 그럼 화장실? 그것도 아니고 불을 피우던 ‘연조’란다.

기와 파편과 무너진 돌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 봉수군이 살던 집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수대는 그 본래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800여 년 간 유지해오던 제도가 폐지된 지 불과 100년 남짓 지났는데도 대부분 훼손되어 그 흔적만 겨우 알아볼 정도다.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곳 중의 하나가 군위 승목산 봉수대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봉수 제도가 폐지되었다. 평생을 봉수군으로 살아온 일부는 봉군 숙소로 사용하던 ‘봉우사’에 계속 머물렀다. 그곳에서 살아가던 부부 중에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아내가 거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평생을 봉수군 아내로 살았고, 때로는 남편을 대신하여 봉수군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을 여인들. 제도가 사라지고 나라가 망한 뒤에도 봉수대를 지켰고 죽어서도 봉수대 안, 여생을 다했던 집터에 영원히 잠든 할머니.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봉할매’라고 부르며 잘 모셨으며 지금까지도 그 애틋한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

봉수군이 살던 집터 가운데에 봉분 하나가 안주인처럼 앉았다. 분묘 가운데에 장딴지보다 조금 굵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도 참나무도 아닌 나무들을 왜 베지 않고 두었을까. 사시사철 장승처럼 저렇게 서서 후손이 없는 할머니를 지키고 봉양하는지도 모른다.

봉수(烽燧)는 의사소통의 한 수단이었다. 봉수대에는 봉수군이 상주하면서 인접 봉수와 신호를 주고받았다. 불을 피우는 연조는 다섯 개가 기본으로 하나의 횃불을 올리면 평안화(平安火)라 하여 나라 안팎이 태평하다는 의미였다. 두 개를 피우게 되면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이다.

우리 집에 횃불 두 개가 타오른 적이 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이 컴퓨터 게임 문제로 다투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보다보다 참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여 다툼은 끝난 듯했으나 종전이 아닌 휴전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온 집안은 무겁고도 깊은 침묵의 늪에 빠졌다.

큰애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동생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부부에게도 일체의 말을 하지 않았다. ‘책값 0000원’, ‘교통비 000원’이런 식으로 적힌 쪽지가 식탁 위를 돌아다녔다. 아내는, 큰 아이가 말문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속으로만 아파했다. 그러한 세월이 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아내는 가정의 평화를 지켜내고자 아이들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였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나는 마치 이방인처럼 입을 다물고 죽은 듯 지냈다.

작은아들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다니게 되자 평안화의 횃불 하나가 다시 집 안에 떠올랐다. 내가 해내지 못한 몫을 아내 홀로 묵묵히 일구어 낸 평화(平和)의 불꽃이었으리라. 우리 집의 봉수대를 맡아 불을 피워 올린 아내는 ‘봉할매’였나 보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쏟아지면 횃불을 올릴 수 없다. 인접한 대응 봉수대에 연락하기 위해 30여 리 힘든 길을 뛰어갔을 봉수군을 생각하며 승용차를 세워 둔 방향으로 발길을 잡았다. 제멋대로 자란 찔레꽃 가지에 양팔이 긁혀 피가 배어 나온다. 얼마나 갔을까.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산등성이를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산등성이가 앞을 가로막는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른다. 절반도 남지 않은 물로 목만 축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길 아닌 길을 두어 시간이나 헤맸다.

모바일 앱 ‘산길 샘’을 검색하여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 테마공원이 우측에 나타났다. 좌측으로만 방향을 잡아 가면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솟았다. 이동통신이 봉수대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800여 년 지속되어 오던 봉수대 신호체계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두 아들은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의 가장이 되었다. 그들은 서울의 제 둥지에서 평안을 기원하는 하나의 불꽃을 매일 피운다. 아들들이 피워 올린 횃불을 볼 때마다 아내와 나는 멀리서나마 자식의 안녕을 빌며 흐뭇한 마음을 주고받는다.

봉수는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도였다. 낡았다고 하여 어찌 함부로 버리겠는가. 오늘날 봉수대는 허물어지고 파묻혀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요즈음 봉수대를 복원하는 지방 자치단체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비록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어 위안이 된다.

‘봉할매’는 승목산 봉수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청도 송읍리 봉수, 영해 광산 봉수 등에서도 확인된다. 안동 봉지산 봉수대엔 ‘봉할매’의 며느리까지 죽어서도 봉수대를 지키려는 듯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름은 고사하고 성도 채 알 수 없는 그들의 유전자가 백두대간의 맥을 타고 이 땅에 끊임없이 흘러가리라.

오늘도 아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손자와 영상 통화를 하며 “할매, 잘 있다”라고 횃불 하나를 올린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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