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김병락

발행일 2021-11-09 09:53:4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세워 놓고 비틀고/후려쳐도 보았다//퉁퉁 눈덩이며/입술마저 부어올랐다//포르르/보풀털 같은/어구 하나 날아왔다

「대구시조 25호」(2021, 그루)

김병락 시인은 2010년 시조시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매호동 연가’가 있다. 존재의 근원을 향한 모색과 내밀한 성찰을 통해 올곧은 삶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탐색하고 궁구한다. 또한 시 쓰기의 본질을 향한 천착과 탐구에 힘쓰면서 실존적 사유를 구체적으로 체화한다. 아울러 단시조 창작에 전력투구하면서 새로운 시의 경지를 열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선이 참신하고 이미지 구사가 실감실정이어서 공감을 안긴다. 정신적 수맥을 찾아 창작의 고삐를 죄면서 또 다른 목소리의 발현을 보인다. 시의 물꼬가 터진 셈이다. 즉 자신이 지향해야 할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퇴고’는 눈여겨볼 작품이다. 세워 놓고 비틀고 후려쳐도 보았고, 퉁퉁 눈덩이며 입술마저 부어올랐음을 진솔하게 토로한다. 글을 다듬는 과정이 순탄치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디, 한 편의 작품이 거저 얻어지던가. 때로는 노심초사하면서 토씨 하나 부사 하나가 과연 적절한지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추고의 과정을 거친다. 이 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언어는 그만큼 민감해서 감각의 더듬이를 잘 벼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 고뇌 끝에 마침내 포르르 보풀털 같은 어구 하나가 날아와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 그 어구 한 잎을 얻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끌어안고 끙끙 앓은 것이다. ‘퇴고’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시작 과정을 간명한 단시조로 빚었다. 음미하다가 외우고 싶은, 아니 저절로 외우게 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는 ‘직·곡선’이라는 단시조에서 전적 직선이다, 라고 말하다가 냉혈의 저 고드름이라고 미적 체현을 보인다. 직선을 두고 이러한 이미지와 의미를 부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속엣것 다 내보이며 몸피를 줄이는데 허방만 붙잡고 선 나 줄곧 곡선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또한 ‘살만큼 살았으이’라는 단시조는 언젠가 지진대피시 누군가 했던 말인 우린 살만큼 살았으이 고마 여 있읍시다, 라고 한 말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몰랐네 내가 그 우리에 들어갈 줄 차마!, 라고 자탄을 한다. 이 작품은 제목과 본문에서 입말 즉 구어체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실감실정으로 가슴을 친다. 좋은 시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작품을 통해 항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가 지향해야 할 한 방향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나는 금방 알지요 양 눈가 언저리에 아스라이 놓여서 슬프면 볼그촉촉히 방울 젖는 내 누이, 라는 단시조는 ‘눈시울’이다. 김병락 시인은 이제 한 경지를 열고 있는 중이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섬세한 관찰과 적절한 이미지 구현으로 시조의 맛과 멋을 내고 있다. 문향이 먹물처럼 고요히 번진다. 시와 더욱 친근해진 것이다. 소개한 그의 작품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라고 발언하고 있는 듯하다. 이 일은 시인 자신에게도 복이지만, 읽는 독자들도 저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되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가을이 깊어져서 만추다. 만추라는 말은 의미심장해서 가슴 깊이 저미어 든다. 이젠 더욱 쓸쓸해지고 외로워질 수 있는 때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명화를 감상하면서 시를 읽는 밤의 시간을 확보했으면 좋겠다. 좋은 시는 우리의 영혼을 드맑게 하고 희망을 안긴다. 시와 더불어 따뜻한 겨울을 맞을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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