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8>태종무열왕 김춘추

발행일 2021-11-08 09:55:1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김유신과 혼인으로 깊은 인연을 맺고 백제를 물리쳐 삼국통일 기반 마련

무열왕릉 바로 앞의 비각과 함께 있는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제25호로 지정됐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군사적으로 항상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흥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빼앗아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신라의 영향력은 크게 신장됐다.

무열왕 시대에서는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고구려를 핍박하는 등 삼국통일의 기반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러한 연유로 삼국통일의 주역 삼인방을 소개할 때는 무열왕, 김유신, 문무왕을 꼽는다.

무열왕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배경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딸과 사위를 백제군에 잃었으며, 둘째 아들 김인문은 당나라에 인질로 맡겨야 했다. 또 요석공주의 남편도 전쟁터에서 잃고, 요석궁에 혼자 머물게 하며 지켜봐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힘을 모아 나라의 안위를 지키며 타고난 지혜와 인품으로 진골 출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결국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으로 등극했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는 불명예를 깨끗이 회복한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의 왕이 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거북모형의 받침돌이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자 상석이 최초로 놓인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무열왕의 업적은 국사에 많이 기록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외교술을 발휘해 당나라의 군사를 얻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일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 할 것이다.

무열왕릉은 경주 서악에 위치해 있으며 몇 안 되는 왕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된 왕릉이다. 무열왕릉의 입구 건무문.


◆태종무열왕 김춘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는 26대 진지왕의 아들로 신라 각간의 벼슬을 지낸 용춘 혹은 용수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둘째 딸 천명공주다. 선덕여왕은 춘추의 이모다.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 문희다. 문희는 언니 보희가 선도산에서 오줌을눴는데 서라벌이 잠기는 꿈을 꿨으며 그 꿈을 비단을 주고 사고 나서 왕비가 됐다. 문희가 왕비가 되기까지 유신의 전략적인 잔꾀가 동원됐다.

유신과 춘추가 축국을 하다가 유신이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리고는 집으로 데려와서 여동생에게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어주도록 하면서 인연을 만들었다. 유신의 기대와 같이 여동생이 춘추의 아이를 가지게 됐다.

선덕여왕이 춘추를 비롯한 대신들을 대동하고 유신의 집 앞을 지나 남산으로 나들이를 하는 시간에 맞춰 유신은 처녀가 몹쓸 일을 했다며 생솔가지에 불을 붙여 여동생을 태워죽인다며 요란스레 소동을 벌였다.

진골출신으로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29대 왕으로 즉위한 무열왕의 무덤은 사적 제20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무열왕릉 뒤로 4기의 거대한 무덤이 일렬로 서 있다.


선덕여왕이 유신의 집에서 연기가 오르는 경위를 물어보고 춘추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닦달하여 김춘추가 유신의 여동생을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전쟁터는 물론 삶의 기술에서도 전술전략이 뛰어난 인재였다.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가장 먼저 당나라 군사를 빌려 백제를 멸했다. 물론 김유신과 같은 뛰어난 장군을 가까운 지기로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없었다면 삼국통일도, 왕위에 오르는 일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해도 전혀 틀림이 없는 말이다.

무열왕의 아픈 손가락으로 꼽히는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묘. 김인문은 생의 대부분 시간이 당나라에 억류됐었다. 결국 당나라에서 죽어 신라로 옮겨와 장사를 지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릴 때부터 화랑으로 함께 손잡고 뜻을 키웠다. 전쟁도 사랑도 두 사람은 함께 했다. 일생을 한 가족처럼 함께하는 동반자였다.

김춘추는 유신의 여동생과 혼인을 했고, 김유신은 춘추의 여식과 인연을 맺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잡혀있을 때 김유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구출 작전에 나섰으며, 백제를 멸하는 마지막 전쟁에서도 목숨을 걸고 함께 전투에 임해 승리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에도 장군으로, 대신으로 큰 역할을 했다. 반란을 제압하고, 다양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왕을 보필하며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깊숙이 가담했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 동남산 통일전에 안치돼 있다.


◆김춘추의 아픈 손가락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수 또는 용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지왕의 아들이다. 김춘추는 할아버지 진지왕이 왕위에서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성골로서 당당히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만만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춘추는 폐위된 왕의 손자라는 낙인이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왕손으로 당당히 왕궁에 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가장 먼저 춘추는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김유신을 벗으로 삼았다. 김유신 또한 할아버지가 가야의 왕이었으므로 어엿한 왕손이지만 패망한 나라의 후손이라 신라에서의 입지는 그다지 당당하지 못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젊은이라고 할까.

춘추는 유신과 뜻이 맞아 크고작은 일에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세력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삼국유사 등에서 태종무열왕이 전쟁이 끝났다며 모든 무기를 묻으라고 지시해 무기를 묻은 곳이라고 해서 지명이 무장산으로 불리게 됐다. 무장사지의 삼층석탑.


두 사람의 이러한 배경으로 서로의 생각도 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유신은 자신의 여동생을 춘추의 부인으로 정략적 결혼을 성사시켰다.

춘추는 또 어머니의 언니가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자 유신과 함께 부풀린 군사력과 지혜를 동원해 궁중의 일에 적극 개입했다. 선덕여왕 말년에는 유신과 함께 반란군을 제압하고, 진덕여왕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궁궐에서 사실적인 최고 실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당시 주변국가에서 침공해오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이때 대야성주로 나가있던 춘추의 사위와 딸이 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춘추는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 정신을 차리고 “장부로 태어나 복수를 못하겠는가”라며 의지를 다졌다. 백제 멸망을 위한 대계를 수립하고 당나라까지 건너가 군사를 빌려왔다.

무열왕은 당나라 군사를 빌려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했다. 자신의 딸자식을 죽인 백제 윤충 장군의 목을 직접 베어 복수에 성공했다.

왕위에 올라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온 힘을 집중하던 무열왕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할아버지에 이어 왕손으로 대를 잇기 위해 아들 법민을 왕좌에 앉혀야 했다. 그러나 상대등의 지위에 오른 김유신 장군의 세력이 워낙 강해 은근히 걱정이 됐다.

무열왕은 자신의 딸을 환갑에 이른 유신에게 신부로 보냈다. 이중삼중 결혼의 고리로 유신의 발목을 묶었다. 왕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김유신 장군을 번갈아 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업을 이뤄 줄 것을 당부하며 눈을 감았다.

김춘추의 마지막 부탁을 들으며 김유신 장군은 가야 왕손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신라 또한 가야의 맥을 이은 나라요,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사내가 왕위에 오른 것 또한 선조들의 유업을 이룬 것이라 자위하면서 무열왕에 이어 문무왕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뤘다. 김춘추의 꿈은 그렇게 이뤄졌다.

무열왕 김춘추는 딸과 사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당나라 군사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시 백제 의자왕과 함께 죽음을 다짐하고 강으로 3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백마강변에 복원된 백화정.


◆김춘추의 전략

김춘추의 가슴에는 한이 맺혔다. 백제군의 손에 죽은 딸자식과 사위의 뼈를 찾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당나라의 황제 태종은 신라의 여왕이 보낸 사신 김춘추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직접 만나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김춘추 또한 속은 타들어 갔지만 속마음의 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당의 대신들과 술자리나 하면서 국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가끔 실세로 떠오르고 있었던 후궁 측천무후를 자극했다. 춘추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측천무후가 자주 드나드는 정전에서 술판을 벌이고는 시를 크게 읊조리거나 취한 채 윗옷을 벗어 제치고 박투술과 칼솜씨를 선보이곤 했다.

김춘추의 빼어난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측천무후가 황제를 꼬드겨 춘추를 궁으로 불러들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도록 했다. 황제도 김춘추의 뛰어난 학식과 언변에 깜짝 놀라며 그를 아끼게 되었다.

동남산 통일전에 세워진 삼국통일의 주역 태종무열왕사적비.


드디어 당의 황제가 “춘추 그대는 멀리까지 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어찌해서 그리 뜸을 들이는가. 어서 털어놓으시게”라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회를 잡은 춘추는 “우리 신라는 황제의 나라를 공경하며 조공을 바쳐오고 있으나 이웃 백제와 고구려가 길을 막고 훼방을 놓아 길이 막혀 황제의 나라에 예의를 다할 수가 없습니다”며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쳐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의 태종은 측천무후를 돌아보며 “저런 고약한 일이 있나.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말을 해야지”라며 “군사 50만을 보내 저들이 다시는 신라와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어 태종은 김춘추를 옆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국사를 의논하자고 권유했지만 김춘추는 신라에 당의 예법을 전하는 등의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대신 자신의 아들 인문을 황제의 곁에 두겠다고 약속하며 빠져나왔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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