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은빛 머리카락 같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인다. 핑크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핑크 뮬리도 빨간빛의 별같이 생긴 단풍나무 잎새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흔들린다. 노란 은행잎은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서 흐뭇한 표정으로 한 해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떡갈나무는 도토리를 주렁주렁 달고 주황으로 물들인 이파리로 길손에게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라고, 머지않아 사라질 가을을 느긋한 걸음으로 즐겨보라고 한다.

입동이 지났다. 수은주가 내려가리라 생각했는데 포근한 주말이었다. 울긋불긋 정수리부터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세미나를 깜빡 잊고 있었다. 부리나케 챙겨 하늘길에 올랐다. 반가이 맞이해주었던 공항 직원이 보이지 않아 근황을 물으니 기약 없는 유급휴가 중이라고 했다.

시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핼러윈 행사로 코로나가 늘었다는 뉴스가 많다. 화장이 지워질까 마스크를 하지 않아 코로나 감염자가 더 생겼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마음에 그날은 정말 가슴 설레고 흥분되는 날인 것 같다. 오래전 타지에 살 적, 그날 받았던 이웃들의 따스한 사랑과 선물을 아이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런 설렘과 추억이 있었던 핼러윈 행사가 코로나 시국이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커다란 호박을 가지고 와서 온 식구가 오려내어 그 안에 촛불을 켜두면서 마음으로 잘 정착하기를 빌었었다. 핼러윈 데이만 돌아오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곤 한다.

핼러윈 옷을 잘 차려입고 병원에 온 아이에게 무슨 행사가 있었느냐 물으니 코로나 때문에 못 했다며 슬픈 표정이었다. 진찰을 마친 아이가 느닷없이 “오늘이 가장 기분 나쁜 날”이란다. “왜?” 그의 어머니와 동시에 물었다. 아이는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지도 않은 채 대꾸한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잖아요!” 아이들을 진찰하는 책상머리에 붙여둔 한 장의 달력에 날마다 기뻐하라는 뜻으로 쓴 “오늘이 가장 기쁜 날”이라는 문구였다. 아이의 말을 듣고 얼른 읽어보니 나도 그렇게 읽혔다. 마음가짐에 따라 글자가 움직여 그렇게 다르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코로나19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어 글귀마저 그렇게 바뀌어 보일 수도 있게 하는구나~!. 읽으며 기분 좋고 기뻐하라고 쓴 구절이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 같아 적잖이 미안스러웠다.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 떠오른다. “짐이 적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니라.” 신문을 받으면 그날그날 운세를 알려주는 페이지를 즐겨보는 이가 하루는 그 문구를 보고는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가늠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고 한다. 짐을 지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대충대충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말년이 이렇게도 힘든가?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수긍하며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더니 그 구절은 “잠이 적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니라”였단다. 그러자 마음이 갑자기 홀가분해져 자리에 누워 늘어지게 잤다고 한다. 자고 나니 마음과 몸이 날아갈 듯 개운해지더라나? 우리 눈은 주인의 마음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적힌 것을 자기 멋대로 저렇게 읽어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그 마음 상태에 따라 우리는 행복하기도 하고 또한 불편해하기도 하지 않은가. 마음의 걱정을 스스로 만들어서 해결이 안 되는 것을 가득 안고서 끙끙댈 때도 많지 않은가. 우리 인생에서 실패와 성공은 0과 100이 아니라 어쩌면 49대 51의 비율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의 편에 하나만 더 올리면 마음도 덩달아 좋아지고 또 기분도 그만큼 더 좋아지지 않으랴. 걱정한다고 만사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을이 저물어간다.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아름답게 성장했던 단풍도 머잖아 사그라질 것이다.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올해의 시간, 하바나를 즐겨보자. 하늘과 바람과 나의 시간을. 가까운 지인에게 하바나를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정말 즐겁게 보았다는 연락이 왔다. 영화 하바나. 90년대 말에 개봉된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다. 미국의 전문 도박사 잭은 포커 게임을 하러 쿠바의 하바나로 가는 배를 탄다. 배에서 잭은 바비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쿠바 혁명군 대장의 아내였다. 짧은 연애 끝에 하바나에 도착한 잭은 게임을 하러 가고, 바비의 남편은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바비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필사적인 잭의 노력 끝에 바비는 자유의 몸이 되지만, 잭은 그녀에게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행 배에 몸을 싣는다. 바비는 하바나에 남고 잭은 키 웨스트 해변에서 바비를 줄곧 기다린다는 줄거리라며 진지하게 영화의 내용을 전한다. 하바나, 하늘과 바람과 나 자신이 하나가 되어보자. 텅 빈 달이라는 11월, 오롯이 즐겨보라는 의미일지니 모두 하바나, 하늘과 바람과 나 자신을, 즐기며 충만한 날이 되시길.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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