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박주영

발행일 2021-11-03 15:09: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 기러기부부의 비극 ~

… 아침 일찍 국제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위독하단다. 물 한잔 마시고 창밖을 봤다. 여느 때처럼 옆집 남자가 현관으로 나와 신문을 가져갔다. 그의 가운을 보니 엄마의 로브가 떠올랐다. 감옥엔 로브가 없을 텐데…. 나는 엄마를 잊기 위해 미국, 영국, 아이슬란드로 도망 다녔다. 한국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갓 깨어난 릴리아스에게 말했다. 그녀가 함께 갈 뜻을 비쳤다. 말없이 그녀를 안아줬다./ 영국에서 회사를 그만 둔 후 유럽을 떠돌았다. 3년을 다니다가 레이캬비크로 왔다. 그때 난민으로 입국한 릴리아스를 만났다. 우린 북극권에 가까운 아쿠레이리로 이사했다. 시차 적응이 어려웠지만 아이슬란드가 좋았다./ 구름이 많고 바람이 심했다. 엄마와 처음 갔던 미국 동네가 떠올랐다. 엄마는 세달 후 귀국하고 혼자 남았다. 친구는 영어에 서툰 일본 아이 뿐,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릴리아스는 공부하러 학교에 갔다. 어느덧 바람이 잦아들고 햇빛이 났다. 밖으로 나갔다. 걷다가 카페에서 차나 한잔 할 생각이다.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다. 릴리아스와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소년이 사진 찍는 걸 따라해 봤다. 같은 곳에서 찍었지만 다르게 보일 터다. 그녀와 살면서 비로소 아이슬란드의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난민신세였지만 인간을 믿고 삶을 사랑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던 해. 엄마아빠가 동반자살을 시도, 아빠는 죽고 엄마는 살았다. 그 보험금으로 미국 명문대학의 비싼 학비를 댔다. 보험금 때문에 엄마가 아빠를 죽인 걸까. 그 후 술로 세월을 보냈다./ 옆집 남자 존을 바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일본에서 온 존은 가슴에 품고 있던 얘기를 했다. 일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마음 놓고 했을 터다. 못 알아듣는 척했다. 아침에 온 전화가 떠올랐다. 엄마의 임종을 봐야 할까. 감정이 메말라선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끝까지 손을 잡아준 분이라고 릴리아스가 말했지만, 우리 엄마에게 그 손이 있을까. 그녀에게 가족사를 고백하지 못할 것 같다. 그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다. 나는 엄마의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한국에 가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그리고 나는 존에게 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눈을 뜨니 집이다. 옆집 남자가 신문을 가져가려고 현관으로 나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필름이 재생됐다. 내가 내 얘기를 하고 눈물을 쏟자 존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침 햇살이 나고 모든 게 선명해졌다.…

기러기부부의 막장 자식사랑은 비극이다. 학비를 대기 위해 보험 살해를 감행한다. 감옥도 엄마의 사랑을 막지 못한다. 그 방법의 잘못이 자식을 망쳤다. 그렇다고 술에 취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게 답일까. 자식이 그 마음을 몰라줘도 엄마는 막무가내다. 엄마에 대한 혐오가 자식의 짧고 좁은 생각 탓일까. 때와 장소, 상황과 환경에 따라 모성애의 변용은 무궁무진하다. 겉모습이 험악하다 하더라도 참모습은 한결같다. 임종을 거부한 선택이 아쉽다. 험한 세상에선 절대 손을 놓지 않는 사람, 손을 놓아야 살릴 수 있는 상황에선 기꺼이 손을 놓아주는 사람, 부모다.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 깊은 정을 깨닫는다. 그 시차 극복이 과제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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