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7>김유신

발행일 2021-11-01 08:43:4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사랑에는 실패한 삶?

단석산 정상에 남아 있는 김유신 장군이 베었다는 단석.


신라 1천년을 이야기하는 데 김유신 장군을 빼놓을 수는 없다. 김유신은 가야의 후손이면서 신라 최고의 장군이 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맹활약 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돼 왕의 칭호를 받았지만 그를 왕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김유신은 진평왕 시대부터 김춘추와 뜻을 맞춰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신라 삼국통일에 많은 공을 남겼다. 특히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궁궐과 외곽지 전쟁터에서 무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장군은 진평왕 대에서부터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까지 다섯 왕의 옆에서 나라를 지키는 충신으로 1천년이 지나도록 불세출의 영웅으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김유신은 출생에 대한 신비, 청년기 천관녀와의 사랑, 김춘추와 인연 맺기, 비담의 난 진압, 재매정 우물설화, 매소성전투사, 삼국통일의 길 등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김유신의 업적이 큰 만큼 그의 흔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그를 기리는 일도 길게 이어지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흔적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와 재매정, 왕릉처럼 꾸며진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 또 그가 청년기의 사랑을 그리며 늘그막에 세운 천관사지, 최고의 장군이 되기 위해 수련한 흔적 단석 등이 있다.

신라 최고의 장군을 기리기 위한 유적으로 통일전에 기념비를 세우고 영정을 두고 향사를 올리기도 한다. 또 경주시민들의 쉼터 황성공원 언덕에 칼을 높이 치켜들고 달리는 형상으로 장군의 동상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경주 월성 서쪽으로 1㎞ 정도의 거리에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전해지는 곳에 신라시대 우물 재매정과 신도비각.


◆삼국유사 속의 김유신

무력 이간의 아들인 서현 각간 김씨의 맏아들을 유신이라 하고 아우를 흠순이라고 이름 지었다. 맏누이는 보희라 하며 어릴 때 이름은 아해였다.

그 동생은 문희이며 어릴 때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595)에 태어났는데 해와 달과 목, 화, 토, 금, 수 별들의 정기를 받아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으며, 또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612)에 검술을 익히고 술법을 터득해 국선이 됐다. 이 당시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낭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유신랑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이 몰두하고 있을 때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은근히 다가와 “청컨대 저와 공이 함께 아무도 모르게 먼저 저 나라를 정탐한 후에 일을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신라의 호국신들이 나타나 백석은 고구려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유신이 백석을 결박해 고문하면서 그 내막을 다그쳐 물었다. 백석이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유신은 본래 우리나라의 점쟁이인 추남이었는데 왕비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며 “추남이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리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고구려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유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즉시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물을 갖춰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삼신 모두가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았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이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해 흥무대왕으로 추증한 김유신 장군의 묘가 릉으로 됐다. 12지신상의 호석으로 둘러 왕릉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


◆김유신의 흔적

-재매정: 재매정은 김유신 장군의 생가로 알려진 건물터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우물로 사적 제24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사적지는 5천481㎡로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추정된다. 신라 최초의 국가사찰 흥륜사지와 신라 1천 년 궁궐 월성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월성에서 약 800m 거리다.

우물은 1.5m 가량의 화강암 기둥으로 위를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깊이는 5.7m 정도다. 우물 옆에는 신라개국공 태대각간 김유신 유허비와 비각이 1872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천관사지: 천관사지는 김유신의 사랑과 효, 충성심에 대한 이야기가 설화처럼 전해지는 곳이다. 천관사는 김유신 장군이 첫사랑 천관을 못 잊어 늘그막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천관의 집터에 지은 절이다. 천관사는 월성에서 남산 방향으로 남천을 건너 5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김유신 장군이 청년기에 천관녀와 사랑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그가 삼국을 통일하고 천관녀의 집을 찾아왔지만 그녀는 없었다. 천관녀를 그리기 위해 김유신이 세웠다는 천관사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붕돌이 팔각으로 이형탑의 모습을 보이고있는 최근 복원한 천관사지삼층석탑.


최근 경주시가 발굴에서 기와조각과 석탑 부재, 건물지 등을 확인하고, 절 주변 정비사업과 함께 3층석탑을 추정 복원했다. 천관사지삼층석탑은 탑신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경주지역에서는 유일한 형식이다. 새로운 볼거리로 탐방객들을 불러 모을 것으로 기대된다.

-단석산: 단석산은 해발 827m 높이로 경주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풍광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신선사마애불상군 문화유적이 신라시대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내밀하게 전해준다.

특히 단석산 정상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면서 단칼에 베었다는 큰 항아리 크기의 화강암이 가운데가 두부를 자르듯 양단돼 오래된 설화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황성공원 동상: 김유신 장군의 동상은 황성공원 가운데 언덕에 말을 타고 북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하며 내린 휘호로 1976년 7월에 시작해 1977년 9월에 준공했다. 장군의 상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위훈을 되새기며 겨레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화랑의 정기 넘치는 서라벌 옛터전에 세웠다.

경주 시민들의 복합문화의 쉼터 황성공원에 김유신 장군을 기려 세운 동상.


-통일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에 남산의 동쪽 기슭에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고, 대한민국 통일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해 건립했다. 통일전에는 신라 삼국통일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통일전에서는 매년 10월7일 당나라를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날을 기념해 통일서원제를 올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묘: 김유신 장군의 묘는 서악마을 옥녀봉 기슭에 왕릉처럼 조성돼 있다. 국립공원 화랑지구로 지정돼 주변이 공원으로 꾸며져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봉분은 신라 중기 왕의 무덤크기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돋을새김했다. 특이하게 쥐와 용의 지신상은 보주를 들고 있어 눈길을 끈다.

-흥무공원: 장군이 죽은 이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서됐다. 이를 기념해 국립공원 화랑지구 김유신 장군의 묘가 있는 입구에 공원을 조성했다. 흥무공원 돌비석 옆에 높은 화강암에 장군의 어록 중에서 “성공하기도 쉽지 않지만 수성 또한 어렵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는 어록비를 세워두고 있다. 공원에는 화장실과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과 벤치, 산책로, 야생화와 다양한 초목들을 심어 아름답게 꾸며 힐링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경주시가 최근 건립한 남산의 화백정. 신라 대신들이 화백회의를 열었던 장소로 알려진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유신의 사랑

김유신은 천관녀와의 풋사랑 이후 이렇다 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청년기의 피끓는 천관녀와의 사랑은 김유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잊지 못했다. 유신이 삼국통일을 이루고 천관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 자리에 그녀를 기리기 위한 절을 지어 천관사라고 했다.

유신은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왕궁을 드나드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서 왕궁에서 두 여인을 마음에 뒀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남았다.

첫 번째는 진덕여왕이다. 자신의 어깨까지 이르는 여인으로서는 매우 큰 키에다 부리부리하지만 검은 눈동자에 지혜가 넘쳐나고, 날렵한 맵씨는 유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제압하고 또 백제의 침략을 물리친 이후 늠름한 기상으로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사내로 마음을 고했다.

경주시가 국립공원 화랑지구 옥녀봉 아래 김유신 장군을 기념하는 흥무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 김유신 장군인 흥무왕을 제사하는 사당 흥무전이 있다.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진덕여왕은 장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키며 “유신공의 따뜻한 생각은 너무나 고마우나 짐의 마음속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어서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군요”라며 슬며시 위로했다. 진덕여왕은 원효를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혼자 애를 끓이고 있었다.

김유신은 전쟁과 정치적 도반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홀로 된 요석공주가 별궁 요석궁에 기거하게 되면서 무열왕과 함께 공주와 자리하는 기회가 잦았다. 무열왕은 과부가 된 딸 요석을 유신의 배필로 짝 지어 주고 싶었다.

유신도 은근히 손재주가 뛰어나고 지혜로우면서 인물이 좋은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무열왕이 어느 날 만찬을 함께하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요석에게 “유신이 남자로 어떠하냐”고 물었다. 요석은 “유신공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장군이요 최고의 남자”라고 치켜세우며 “그렇지만 저는 마음속에 원효를 품은 지 오래됐어요”라며 오히려 원효를 배필로 맞아주길 청했다.

김유신 장군묘 아래 조성된 흥무공원에 김유신 장군의 “성공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성공한 것을 지키는 것도 또한 어렵다”는 내용의 어록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결국 유신은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곁에 두지 못하고, 늦게 무열왕과 누이동생이 낳은 조카와 인연을 맺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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