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김덕현

발행일 2021-11-02 10:21:0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방 아랫목 보금자리/생명의 씨, 누에 알 하나/꿈에서 깨자마자, 봄비처럼 사각사각/가만히, 살피어 가며/뽕잎 갉는 이른 아침//해거름 창문 너머/산 뽕잎이 짙은 날/이제는 승화의 시간, 이것은 나의 숙명/네 번째 꿈에서 나온/누에 다짐 들었지//청솔가지 꺾어 세운/제단 위에 몸을 뉘어/욕망의 실을 뱉어 고치솜을 지을 때 난//베갯잇, 씨앗을 안고/그렁그렁 뒤척였지

「한티재 꽃피다」(2021, 동학사)

김덕현 시인은 경북 군위 출생으로 199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최근 첫 시조집 ‘한티재, 꽃 피다’를 펴냈다. 그는 이번 시조집에서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시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각 도의 지리, 풍속, 인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우리나라의 지리서다. 그는 축소해서 한티재를 중심으로 한 고향의 풍광과 정서와 스토리를 엮고 있다. 말하자면 특별한 이야기다. 이 특별한 이야기가 개인적인 회고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온고지신이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새것을 알게 되는 계기다. 그것은 곧 미래를 다르게 열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줄 것이다. 또한 새로운 힘의 충전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장해온 배경과 무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시인의 고향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깊은 울림을 가진 정서는 곧 그리움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울컥하게 하는 향수다. 그래서 그의 시조 세계를 향수에 근원을 둔 향토적 상상력의 보고, 라고 명명한다. 향토적 상상력에 기원을 둔 그의 시 세계는 그 누가 읽어도 공감할 것이다. ‘보고’라고 일컫게 된 것은 정경과 내면을 감칠맛 나게 버무리는 그의 기량 때문이다. 살갑고 다정하며, 열정적인 그의 언어는 내밀한 정서와 잘 결합돼 독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또한 그의 품성이 작품 곳곳에 배어들어 훈향 높은 미학적 직조를 이루는데 기여하면서 꽃향기와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한티재, 꽃 피다’는 소중한 시조집이다. 그나 그의 가족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개성적인 호흡과 정서와 사상과 감정이 오롯이 담겨 큰 파장을 일으키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책이 될 것이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오늘이 있기까지 살갑게 붙들어준 고향에게 바치는 소담한 헌정시집이기도 하다.

‘그날 밤 나는’은 누에치기 농사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방 아랫목 보금자리 생명의 씨, 누에 알 하나 꿈에서 깨자마자, 봄비처럼 사각사각 가만히, 살피어 가며 뽕잎 갉는 이른 아침, 이라는 첫수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할 만큼 세밀하고도 그윽한 묘사 일색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정다감한 분위기를 연출한 다음 둘째 수에서 해거름 창문 너머 산 뽕잎이 짙은 날 이제는 승화의 시간, 이것은 나의 숙명이라면서 네 번째 꿈에서 나온 누에 다짐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셋째 수에서 청솔가지 꺾어 세운 제단 위에 몸을 뉘어 욕망의 실을 뱉어 고치솜을 지을 때 화자는 베갯잇, 씨앗을 안고 그렁그렁 뒤척였던 일을 상기한다. 이처럼 누에치기를 통해 승화의 시간을 바라보는 일은 값지다. 삶이 한 단계 더 성숙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누구나 가슴속에 한티재 하나씩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웠다, 라고 말하고 있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또한 웅숭깊은 내면의 깊이가 헤아려진다. 그러니까 한티재는 하나의 상징체계로 독자들은 각자의 경험 안에서 변주해 읽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를 음미하는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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