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경주부 관아건물

발행일 2021-10-31 19: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경주시 동부동에 위치한 관아건물 통해 조선시대 엿봐

집경전구기도 경주 읍내 전도 통해 명칭 위치 전해져

일제시대 관아 건물 정비 시작…목소리 낸 경주시민들

신라 천년 이후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라의 오랜 수도였던 경주는 현재 진한 신라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신라 자취를 찾아 거슬러 가다 보면 경주 곳곳에서 예상보다 많이 마주하는 것이 조선시대 흔적들이다.

경주시 동부동에 위치한 ‘경주부 관아건물’도 수많은 흔적 중 하나다.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경주읍내전도’와 경주의 과거 기록을 개편 증보한 ‘동경통지’를 통해 파악된 ‘경주부 관아’는 부지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다. 경주부 관아건물 내아 모습.
◆조선시대 경주의 위상

935년(경순왕9) 10월에 경순왕은 신료와 백성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났다. 경주는 수도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고려의 수많은 주중 하나인 ‘경주’가 됐다. 왕궁과 성곽은 허물어져 황량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려사 지리를 보면 동경유수의 관할을 명시했다. 속군 4곳, 속현 10곳, 영군 5곳으로 나눴다. 속군과 속현으로 볼 때 대구 수성구과 신령, 장기, 청하까지 포함돼 있다. 관할 지역이 넓고 백성들도 많은 지역이었지만 소속 영속은 다른 지역으로 이속됐다. 이로써 관할은 점점 줄어들었다.

고려시대 경주에 대한 흐릿해진 흔적들은 조선시대 이르러 각종 사료로 다시 살아난다.

조선시대 경주는 영남의 웅부로서 관원의 왕래가 잦았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 권역은 매우 넓어 사람들은 많고 물량이 풍부했다.

조선시대와 현재 모습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경주는 경주부윤, 즉 종2품이 다스리는 도시였다. 전국에 부윤은 경주부와 전라도의 전주부, 함경도의 영흥부, 평안도의 평양부, 의주부 정도만 있을 정도로 현재 광역시장급 정도다. 또 도지사급의 관찰사와 같은 종2품으로 높은 품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경주읍성과 관부는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다. 여러 관아 건물이 유기적으로 나눠져 있었고 그 명칭과 위치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낸 지도가 1789년(정조22)에 제작된 집경전구기도의 경주 읍내 전도다.

채색 필사본이고 상태는 양호하다. 조선시대 경주읍성을 그린 여러 본의 지도 가운데 관부 건물을 거의 빠짐없이 그려놓은 것은 구기도가 유일하다. 이를 통해 읍내 중요한 관부의 실상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관아건물 부사. 현재는 경주문화원 도서실로 사용하고 있다.
◆경주부 관아건물

경주부의 관아에는 어떤 부서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만큼 세분화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부서가 모두 읍성 안에 밀집돼 있었다. 객사를 비롯해 행정, 세무, 군무 등을 맡아보는 작은 부서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집경전구기도를 보면 읍성 내에 대표적 건물은 객사인 동경관이다. 당대 임금의 위패인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고 사신이나 관원이 유숙했기 때문에 읍내에서 가장 중심지, 높은 곳에 위치해 권위적인 위용을 과시했다. 현재 경주경찰서 동편에 헐리다 남은 건물이 그것이다.

동경관 다음 건물로는 부윤이 집무하는 동헌, 곧 일승각이다. 부윤이 머물던 일승각에는 많은 관속이 따랐던 관아의 핵심 자리다. 일승각 바로 서편에 내아가 있었는데 지금의 경주문화원 자리다.

내아 뒤에는 공방과 토지대장을 소장하고 조세를 부과했던 전결소가 있었고, 서편길 건너에는 관노방이 위치해 있다. 특별히 선발된 군관이 머문 선무별장소는 지금 경주동산병원 주변이다. 그 뒤쪽 읍성 서문인 망미문 거리의 북쪽에 죄수를 수용하는 옥과 병사를 훈련시키던 양무당이 있다.

그리고 동경관 동편, 지금의 경주교회 자리에 무학당이, 그 뒤편에는 호적을 발급했던 호적소, 바로 뒤에 관아의 하급 서기가 일을보던 부사가 자리매 있다. 이보다 좀 더 뒤편에 향소청이 있었는데 수령을 자문하고 향리를 규찰하던 민간자치기구로, 동문인 향일문 부근에 있다.

성덕대왕신종 종각. 1905년 경주읍성 남문밖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중앙관료가 경주부 관아로 향한 길

한성에서 경주로 내려오는 길은 ‘한성~용인~안성~문경~상주~칠곡~대구~영천~건천~경주’로 영남대로를 이용해 내려왔다. 통상 한성에서 부산까지는 15일이 걸리는 것을 유추해 보면 한성에서 경주까지는 대략 12~13일 정도 걸린 것으로 추측된다.

영남대로의 막다른 길 형산강을 건너 읍내로 진입한다. 성문은 경주읍성의 남문인 징례문을 향하는 길이다. 옛 남문이었던 징례문 위치 앞에 있었던 홍살문은 현재 ‘봉황로’에 복원돼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주문화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주부 관아로 가는 길은 현재 좁은 골목길로 변했다. 왼쪽으로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과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이 위치하고 있고 오른쪽은 동부119안전센터와 경주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다.

경주관아는 경주부에 있어 사법, 행정, 국방의 중심지였다. 동헌은 현재 KT&G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동헌 건물들과 부속 건물들은 1914년 부군폐합령이 내려지면서 공공기관으로 새롭게 쓰이게 됐다.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경주로 온 관료들은 공식행사를 진행했다. 바로 집경전 방문이다. 의관을 갖춰 입은 관료들은 집경전으로 향해 첫 번째 공식 행사를 진행한다.

태조 이성계는 쿠데타로 왕권을 잡았기에 정통성 결여가 큰 근심거리였다. 이런 걱정을 잠재우기 위해 실시한 방법 중 하나가 왕의 어진을 그려 각각 큰 고을을 중심으로 봉안케한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어진을 모신 곳인 ‘어용전’이다.

경주 어용전인 집경전은 1398년(태조7) 판삼사사 설장수에게 명해 자신의 어진을 경주부에 어용전을 짓고 봉안하니 그것이 최초 집경전 탄생의 배경이 됐다.

조선이 성장하면서 이 집경전은 경주의 가장 큰 성역이 됐다. 때문에 경주를 방문하는 관료 누구라도 집경전에서 예를 갖추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됐던 필수 공식 행사였다.

집경전에서 예를 갖춘 관료는 왕명을 전달해야 한다. 교지를 부윤에게 전달하는 것이 두 번째 임무다. 왕명을 하달하는 곳은 큰 고을이면 어느 곳에나 있었던 객사다.

객사의 기능 중 지방 출장중인 관료들의 숙소 역할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를 안치하는 것이다. 경주부윤과 관리들은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관아건물 양무당.
◆일제강점기 경주시민들의 수호 운동

일제강점기에 읍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허물어졌다.

경주 관부의 상징이자 읍성의 대표적 건물이었던 징례문(남문)은 1910년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에 의한 읍성 및 관아 건물 정비가 본격화됐다.

당시 내아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사용됐었다.

그 운영의 중심에는 총독부의 일본인 관료나 대구·경주의 일본인 유지들이 있었으나 경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경주민들의 주체적인 유물 수호 운동인 ‘금관총 유물 경주 유치운동’이다.

1921년 9월25일 노서리 고분 일대에서 출토유물을 가지고 노는 조선 어린이들이 목격됐다. 이틀 뒤인 9월29일, 일본 거류민을 통해 금관이 출토됐다.

총독부는 금관총에서 유물이 발견되자 그 출토유물들을 경성(서울)으로 옮기려고 했다. 유물 보관에 적합하지 않아 경성으로 옮겨 보관하겠다는 근거였다.

이에 경주시민들이 항의해서 벌인 운동은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당시 경주청년회와 경주장로교회는 ‘신라고적환등순회’를 기획했다. 이것은 1923년부터 조선 전역을 순회하면서 경주의 유적과 유물을 사진으로 소개하고 기부금을 모은 활동이었다.

순회는 각지 조선인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환등순회는 조선 전역에 한민족의 기원적인 의미를 지닌 신라문화를 시각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전개된 유치운동을 통해 모은 기부금과 경주시민들의 기부금을 모아 건립한 건물이 ‘금관고’다. 이때 세워진 ‘금관고’는 내아 바로 옆에 위치해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경성에 올려보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운영에 조선인들이 목소리를 낸 운동은 또 있다.

경주의 관아건물 중 한 곳인 일승각은 당시 경주군청과 경주세무소 청사로 사용됐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의 집무공간이었던 일승각은 일제기 단순한 실무 청사로 전락했다. 전통건축물은 근대적 행정기관 청사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이를 허물고 신청사를 건립하는 것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고적 등록이 돼 있지 않았던 일승각을 보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경주박물관 확장운동이었다. 일승각을 경주박물관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영구히 보존될 것을 노린 것이다.

만약 ‘일승각 보존운동’이라는 표현으로 운동을 벌였을 경우 일본 측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경주박물관 확장운동은 재정난 등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그 자리에는 세무서 신청사가 건립됐다.

그러나 일승각을 허물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읍성 남쪽의 고분군 가운데로 이축돼 기림사 경주포교당이 됐다. 일승각을 허물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인들이 일승각을 바라보는 애착에 대한 배려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유치운동은 경주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손을 잡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맞서 성공을 거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운동이다.

경주는 왕조 시대와 지방제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 적극적인 경주시민의 주체성 확보 운동도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의 성쇠가 한 곳에 집약돼 있는 곳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신라역사에 비해 가려져 있었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에 대해 경북문화원 고복우 사무국장은 “경주 사람들은 신라의 유산 위에 역사를 쌓고 자부심을 지켜온 것”이라며 “경주의 조선을 발견해가는 과정은 단절된 역사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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