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종식이라는 막연한 희망은 이제 ‘위드 코로나’란 생소한 이름으로 바뀐 지 오래다.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지만 쉽게 말해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란 이름으로 수많은 서민과 자영업자들의 희생을 강요해 왔던 핑크빛 희망이 체념과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무엇 하나 희망의 전조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추세이며 인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항변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감당해야 할 것인가?
만원을 들고 장보기를 해본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대형 할인마트를 이용해 보지만 무 1개(1천500원), 작은 고구마 6알(4천 원), 양파 5알(5천 원)이 고작이다. 만원으로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던 시절은 이미 옛말이 됐다. 카트를 끌고 가득 찬거리를 사는 사람들이 부러운 현실이 됐다. 서민들의 대표 음식이라는 라면 가격 또한 상승했다. 혼술과 혼밥이 익숙한 젊은 세대의 먹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하지만 확증편향으로 무장한 어느 집단(?)은 ‘커피값은 아깝지 않고 먹거리 오르는 것을 탓하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삶의 질은 단순한 비교의 수치가 아님에도 그들은 애써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할 것이다. 누군가의 주관적 만족마저 획일화된 자신들의 테두리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니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의 수치와 접종 후 사망 사고에 대한 인과관계도 끊임없는 논쟁으로 계속되고 있다. 기저질환자들의 사망이라고 발표하던 중앙 방역대책본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20대의 청년들과 건강하던 국민의 죽음이 그것이다. 백신 접종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듯 홍보하며 중증으로 갈 확률이 낮아진다고 하지만 사망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는 발표인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중앙대책본부가 각본에 맞춰진 정부 정책의 전위대로 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백신 접종으로 인한 사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며 접종을 강요하는 세력이 마오쩌둥의 홍위병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흔히 삶에 대한 만족도를 ‘행복지수’란 말로 표현한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스스로 측정하는 지수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코언이 18년 동안 연구해 만든 행복공식으로 삶의 만족도를 계량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개인적 특성, 생존조건, 고차원적 상태 등 3요소가 행복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 3요소 중 건강, 돈, 인간관계 등의 ‘생존요소’가 인생관, 적응력의 개인적 특성이나 야망, 기대의 고차원적 상태보다 3~5배 더 중요하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삶의 질이나 행복을 절대적 수치로 계량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치가 결코 행복감을 높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희망 고문’으로 2여 년의 세월을 고통으로 보내온 국민에게 남은 것은 가계대출과 폐업, 그리고 인과관계마저 불명확한 죽음과 책임소재 없는 ‘벙어리 냉가슴’이다.
김시욱 애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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