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 둔 발자국을 그대 딛고 돌아오라/살풀이 긴 자락을 모둠발로 내린 자리/뜨거워 눈을 감으면 가슴속도 불길이다//눈물은 별빛의 씨 뿌리 속 젖는 온기/헝클린 길을 닦아 붉은 살점 뚝뚝 진다/스러져 뼈마저 녹아 빈 하늘이 고이도록//오가는 꽃잎끼리 받드는 소신공양/명치에 갇힌 돌이 이보다 가벼우리/한 무리 지는 꽃 앞에 맑게 우는 종소리

「서정과 현실」(2021, 상반기호)

전연희 시인은 1988년 시조문학 추천완료로 등단했고, 시조집으로 ‘얼음꽃’, ‘이름을 부르면’, ‘귀엣말 그대 둘레에’와 현대시조 100인선 ‘푸른 고백’ 등이 있다.

‘꽃무릇 별사(別辭)’는 탁월한 표현으로 서정적 진경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별사는 이별의 인사나 말이다. 헤어질 때 하는 말을 고급한 비유의 시조로 노래했으니 이별마저도 아름답다. 품격 있는 별리다. 그것도 ‘꽃무릇 별사’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정읍 내장사가 가을에 꽃무릇의 화려한 연출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매년 추석 무렵이면 만개하는데 불난 것처럼 빨갛게 피어나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무릇 별사’는 남겨 둔 발자국을 그대 딛고 돌아오라, 라면서 살풀이 긴 자락을 모둠발로 내린 자리, 뜨거워 눈을 감으면 가슴속도 불길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순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화자는 눈물은 별빛의 씨 뿌리 속 젖는 온기, 라는 은유로 시의 폭과 깊이를 더하면서 헝클린 길을 닦아 붉은 살점 뚝뚝 진다, 라고 절박한 정황을 밀도 높게 직조한다. 그것은 스러져 뼈마저 녹아 빈 하늘이 고이도록, 만드는 경지다. 오가는 꽃잎끼리 받드는 소신공양이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부처 앞에 바치는 일이 소신공양이기에 여기서 사랑의 극치를 본다. 더 이상 어떤 말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명치에 갇힌 돌이 이보다 가벼우리, 라고 노래하고 있다. 결구는 공감각을 동원하면서 한 무리 지는 꽃 앞에 맑게 우는 종소리, 라는 마무리를 통해 정갈하게 끝맺는다. 사랑의 다함없는 승화다. 이렇듯 ‘꽃무릇 별사’는 서정적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잘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바로 탁월한 표현이다. 남다른 언어운용과 이미지의 직조로 새로운 미학적 질서와 성취를 이뤘기에 또 다른 한 편의 단아한 서정시가 태어난 것이다. 연금술사로서 오랜 적공의 성상을 보냈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어떤 일에 많은 힘을 들이며 애를 쓰는 일이 그만큼 지고지난하지만 잘 견디게 되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세계를 축조할 수 있다. 기다림의 미학이다.

그는 또 ‘푸른 고백’에서 내 속에 가두어진 섬이 하나 있습니다, 라면서 밀물이면 남실남실 꽃그늘에 흔들리고 썰물엔 달랑게 혼자 모랫벌을 움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지나버린 일이 모두 떠난 것이 아니던 게 울컥울컥 살아오는 보름날 눈뜬 밤엔 뒤채는 물결 달래어 동백꽃이 붉은 것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하여 섬 하나 품고 사는 설레는 마음 동안 가문 땅 어디라도 짙어 오는 초록 천지임을 바라보며 툭 건져 나누고 싶은 자라는 섬이 내 안에 있음을 애써 강조한다. 진실로 푸른 고백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 안에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안식도 하고 관조도 하며 충전의 시간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견지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푸른 고백’도 ‘꽃무릇 별사’와 일맥상통한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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