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6>선덕여왕

발행일 2021-10-25 10:47:3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신라 최초의 여왕, 첨성대 축조

황룡사구층목탑 설립 등으로 선정 베풀어



경주 낭산의 선덕여왕릉.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진평왕의 꾸준하고 치밀한 지원 덕분이다. 그러나 마냥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는 못했다.

진흥왕의 무차별적인 전쟁으로 인한 영토 확장이 가져온 외부세력의 도전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내부적으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권에 도전하는 실력자들이 난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조카 김춘추를 중심으로 김유신 장군 등의 우호세력을 앞세워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 한편 내부의 적들을 상대하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분황사, 영묘사 등의 중요사찰을 지어 불교를 중흥하는 일에 열중해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력을 키우는 중심이념으로 삼았다.

특히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 중심에 거대한 규모의 구층목탑을 세웠다. 황룡사구층목탑은 당시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상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동원된 기술도 1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놀랄 정도로 뛰어나지만 외형적인 규모도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선덕여왕은 타고난 지혜로움으로 인재를 중용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마음을 널리 펼쳐 첨성대를 건축해 천기를 살피면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여왕은 현명하고 탁월한 미모를 자랑했지만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걷잡을 수 없이 안팎에서 닥쳐오는 위기들을 맞이했다.

이러한 위기를 잘 대응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비담의 난으로 쓰러져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선덕여왕의 업적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첨성대.


◆선덕여왕

제27대 신라 왕인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세 가지 미리 알아맞힌 일 등으로 현명한 왕으로 평가 받는다.

첫째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빛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려진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내 뜰에 꽃을 심으라고 명령했다.

그 꽃이 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더니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해 왕에게 물었더니 왕이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에게 명령했다.

날랜 병사 2천 명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물어서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엄습해 죽이라는 것이었다.

2명의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과연 부산 밑에 여근곡이 있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백제 군사를 모두 잡아 죽였다.

선덕여왕이 건립했다는 분황사와 황룡사구층목탑의 사이에 형성된 공터에 황화코스모스 등의 꽃단지가 계절별로 조성되고 있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라”고 말한 것이다.

여러 신하들가그곳을 알지 못해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고 답했다.

왕이 이야기한 날이 되자 과연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여러 신하가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로써 대왕이 영험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사건을 미리 알았습니까?”라고 여쭈니 “그려진 꽃에 나비가 없어서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남편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다”고 말했다.

또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라는 것은 여인의 음부이고, 여자는 음이고 그 색깔은 흰색이다. 흰색은 서쪽 방향이기 때문에 서쪽에 병사가 있음을 알았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옥문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적병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고 답하자 모두가 왕의 지혜에 탄복했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인재들을 당나라로 유학시켜 공부하게 하고, 신라에도 국학을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 백제와 고구려 등의 침략전쟁이 많아 어려움을 겪으면서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삼국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자장율사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해 세원 황룡사구층목탑의 원형을 추정해 10분의 1 크기로 복원한 황룡사구층목탑.


기록적인 업적들도 길이 전해지고 있다. 첨성대를 쌓아 천문을 살피거나 나라의 길흉을 점치며 안녕을 빌었다. 지금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없는 기하학적 기술로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워 불교중흥으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상대등 비담의 난을 겪으면서 재위 16년 만에 생을 마감하고, 그의 4촌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분황사 마당의 분황사모전석탑.


◆선덕여왕의 흔적

선덕여왕의 흔적은 선덕여왕릉과 황룡사 구층목탑, 첨성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보문동 낭산에 있는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1969년 사적 제18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선덕여왕릉은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 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 정상이라 알려줬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됐다고 전한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사천왕사지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길은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책로로 조성돼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선덕여왕이 경치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신들과 함께 나들이에 나서 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 왕이 머무는 정자가 하늘에 떠있는 모습을 연출 운대리의 부운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온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건립했다. 용춘은 건축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건축기술이 뛰어난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해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으로 건립했다.

높이 82m로 지금의 27층 높이 건축물이다. 순수 목조건축물로 현대 건축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의 과학이 깃들어 있다.

심초석에서 당나라가 제조한 것으로 밝혀진 백자항아리가 발견돼 당나라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1238년 몽고 침략전쟁 당시 불에 타 없어지고 주춧돌과 심초석만 남아 있다.

첨성대는 신라 1천 년을 지나 지금까지 동부사적지 가운데 위치해 경주역사문화관광의 1번지로 주목받고 있다.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라는 설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설이 부딪치고 있다.

첨성대는 27계단으로 쌓아 27대 선덕여왕과 의미가 겹친다.

맨 윗층의 사각형 단과 아래층 기단을 합하면 29층으로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한다.

중앙의 창문까지 12단이고, 창문 위에서 꼭대기까지 또 12단인데 이것은 1년 12달과 24절기로 풀이된다. 첨성대를 쌓은 돌벽돌은 365개로 1년의 길이에 해당된다.

기단석은 네 방향으로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맞추고 있고, 남향의 창문은 태양이 비칠 때 춘분과 하지, 추분, 동지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첨성대의 구조와 기록 만으로 첨성대가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천문대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을 미루어 천문대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할 뿐이다.

선덕여왕이 신라 주변 9개 나라를 층별로 상징해 순수 목조탑으로 세운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과 기초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왕의 남자

진평왕은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태자의 아들로 13세에 왕위에 올라 632년까지 53년 동안 재임하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다.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에 이은 훌륭한 신체적 인자를 물려받은 진평왕의 체격은 11척이나 되는 거장이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진평왕은 딸들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 천명, 덕만, 선화, 보화, 천화공주 등의 다섯 딸들을 왕족들의 아들들과 연을 맺어주려 서둘렀다.

진평왕은 삼촌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와 용춘을 천명, 덕만공주에게 각각 짝을 지어주었다.

덕만이 왕위에 오르자 용춘은 자신의 마음은 천명에게 있었다며 부왕이 되는 부담에서 벗어나려 했다. 결국 용춘은 여왕의 남자 자리를 내어 놓았다.

선덕여왕이 경치를 구경하던 곳에 라왕대라는 연꽃을 새긴 좌대가 있었는데 사라지고, 지금은 마을사람들이 만든 라왕대가 있다.


반면 상대등의 자리에 앉아 실질적인 나라의 살림을 도맡아 있던 비담은 여왕을 마음에 두고 끈질기게 도전했다. 비담의 마음은 여왕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권력의 욕심이었다. 이를 눈치채고 있었던 선덕여왕은 끝까지 비담의 청혼을 거부했다.

비담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음이 통했던 대신 염종과 함께 왕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이미 선덕여왕이 눈치채고, 김유신과 김춘추를 통해 궁궐을 철저하게 방비하게 해 궁궐에서의 반란은 막았다.

비담은 궁궐 외부까지 동원했던 군사들을 명활산성으로 집결시키고 내란을 도모해 성공하는 듯했으나, 김유신 장군의 기지로 실패하고 반란전쟁 중에 잡혀 처형 당했다.

선덕여왕 덕만은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용춘 이외에 화랑 중에서 빼어난 청년들과 관계를 가졌으나 이미 나이가 들어 후사를 보지 못하고, 비담의 난 영향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사촌 여동생 진덕여왕이 유신과 춘추의 도움을 받으며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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