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5>진평왕

발행일 2021-10-18 10:30:3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3세에 왕위에 올라 왕권정치 확립해 딸에게 왕위 물려줘

경주 남촌마을에 위치한 진평왕를 주변은 햇살이 따스하게 드는 양지 바른 곳으로 고목들이 정원수처럼 펼쳐져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이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으로 세자 책봉을 받았으나 아버지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평왕은 미실과 노리부의 전략적인 추천으로 13세에 즉위해 54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진흥왕이 눈부시게 확장한 영토를 정비하고, 부강하게 하기 위한 노력에 많은 공을 들였다.

건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었다.

진평왕은 태어날 때부터 잘 생기고 체격이 좋아 키가 11척이나 됐다. 생각이 깊고 총명하며 의지가 강해 나라를 다스리는데 대신들이 무리 없이 잘 따르게 했다.

진평왕 때는 진흥왕이 크게 영토를 확보한 탓에 땅을 빼앗겼던 백제와 고구려 등의 변방에서 자주 침범해와 전쟁이 잦았다. 왕은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 성을 쌓았다.

왕은 불교를 장려하며 원광법사를 중하게 대우해 외교문서를 비롯해 크고작은 국사의 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왕에게 아들이 없어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어 선덕여왕이 됐다.

진평왕릉의 모습.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 남촌마을 앞 보문들과 연접해 고즈넉한 공원으로 조성돼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왕릉이다.


◆진평왕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으로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다. 박혁거세를 제외하고 신라 천년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왕으로 기록된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잦은 전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불교정책을 통한 왕권강화 등으로 바야흐로 꽃을 피웠다.

그의 뒤를 이어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보필했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삼국통일 위업의 기초를 다졌다. 삼국통일의 모든 것이 진평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평이다.

진평왕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열세살인 579년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다.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뜻을 이어받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신성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진평왕 자신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 백정, 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 마야부인, 동생 둘은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 백반과 국반으로 지었다. 가족 모두가 석가모니 가족과 같은 이름을 지어 신성화 했다.

남산신성터에서 비편이 발견되면서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신해년 591년에 쌓았다는 것이 정확하게 파악됐다. 지금까지 깨끗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남산신성터.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 백반을 진정갈문왕, 국반을 진안갈문왕으로 임명해 왕실의 세력을 친정체제로 두텁게 했다.

동생 두 명은 형의 좌우에서 형의 말을 충실히 듣는 심복으로 성장해 자연스레 사도부인 같은 기존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진평왕은 재위 6년 째 되던 해에 수렴청정에서 벗어나면서 건복(建福)으로 연호를 바꿨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만의 독자적인 역사 만들기에 나섰다. 13년에는 남산신성을 길고 튼튼하게 새로 쌓고, 이어서 명활성을 고쳐 쌓아 왕경의 주변 방어태세를 굳건하게 했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백제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그치질 않았다. 신라가 팽창해 가는 만큼 주변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경주보문관광단지 서쪽 명활산을 에둘러 산성터가 남아있다.


진평왕은 가까운 백제와 고구려 등의 침공에 대응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원광법사와 담육 등을 중국에 보내 공부하게 하는 등 불교 진흥에도 크게 노력했다. 진평왕은 황룡사를 크게 중창했다. 동서 금당을 추가로 지어 1탑-3금당의 가람구조로 변화했다.

진평왕 53년에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다행히 초기에 발각돼 칠숙을 잡아 처형시켰다. 석품은 백제 국경으로 도망쳤지만 끝내 붙잡아 처형하는 단호한 징벌을 통해 왕권의 권위를 세웠다.

진평왕은 사촌 동생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이는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딸인 덕만으로 왕위를 이었다. 바로 선덕여왕이다.

경주 안강읍 두류리의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남산신성과 명활산성

경주보문관광단지 입구 서쪽 낮은 산을 둘러 산성이 조성된 흔적이 있다. 신라시대 실성왕이 동해에서 공격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처음 쌓아올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명활산성비의 기록에는 진흥왕 때인 551년에 성을 쌓았다며, 축성에 참여한 인부와 책임자 등의 내용을 기록한 비는 당시 시대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진흥왕이 1천900여 보에 이르는 명활산성을 쌓았다. 이어 진평왕이 허물어진 명활산성을 보수하며 자연석을 깨뜨려 특별한 가공없이 3천여 보의 산성으로 길게 새로 쌓았다.

또 진평왕은 남산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적으로 남아 있다.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591년에 축조했다. 전체 둘레 5천137m 포곡식산성이다.

보물 제317호와 318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가 봉안돼 있다.


산성터에서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문의 6개소에 문지가 발견됐다. 동문지는 옥룡암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지만 대부분 파괴돼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남문지는 해목령에서 전망대로 가는 순환도로와 연결되는 성벽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폭이 5m이고 부근에 신라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돼 문루가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산성 내부에는 22개소의 망대가 확인된다. 망대는 동쪽과 남쪽에 18개소가 집중돼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9년에 남산신성의 성벽을 증개축했다는 기록이 있고, 길이 100m에 이르는 긴 창고를 비롯 3개의 대규모 창고터가 발견되면서 지금도 검게 탄 쌀이 흩어져 있다.

남산신성터에서 비편이 발견되면서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신해년 591년에 쌓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했다.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순서대로 이름이 붙은 8비와 9비는 남산신성 안에서 발견됐다.

남산신성비는 발견된 자리와 규모 등을 비추어 20개에서 200개 정도가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비는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체제와 역역동원 등에 관련한 문제, 촌락구조 문제 등을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지었고, 진흥왕 시기인 임신년에 두 화랑이 충도를 맹세한 내용이 기록된 돌 임신서기석.


◆진평왕과 원광법사

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숲을 내달렸다. 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 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 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 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 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명활산성터에서 발견된 명활산성작성비.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전시하고 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 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 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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