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정명희

발행일 2021-10-17 16:05:0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불어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가을을 밀어내고 겨울이 바로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것 같다. 노란 국화 송이들이 채 피어나기도 전에 화분에서 오르르 떨고만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정원의 작은 나뭇가지의 잎사귀 속에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발견했다. 작은 등불을 켠 듯 수줍게 달린 열매들이 참으로 신기하다. 검색 엔진을 눌러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보니 인터넷 식물 사전에는 주목 나무 열매라고 나온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이 간다는 그 주목이란 말인가, 아파트에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고작 1m 정도의 키, 작은 가지에 열매가 많이도 달렸다. 빨간 열매의 보드라운 겉껍질 안에 작은 씨앗 하나가 들어 있다. 입에 넣어보니 특이한 맛은 없다. 크리스마스실처럼 빨간 열매를 달고 우리 정원의 울타리가 되어 굳건히 지켜줄 나무라 더욱 정감이 간다.

나의 울타리를 마련한 지 어느새 100일이 다 돼간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비 오듯이 땀을 흘려가며 시원한 물을 찾던 공사 현장에서의 날들이 떠오른다. 뜨겁고 힘들었던 더운 날은 어느새 선선한 가을로 접어들었고 이제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 달력이 나오리라. 처음 개원하려고 마음먹고서 조언을 구할 때 이런저런 염려를 전하면서 개원을 말리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다. “코로나가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이때 개원을 하다니? 몇 달 만이라도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찬찬히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여러 사람 조언 잘 새겨듣고 천천히 시작하지 그러니? 태어나서 일만 하다가 갈 거야!” 애정이 어린 충고를 정말 많이 들어서 슬슬 걱정도 되었다.

시간이 해결사라고 하던가. 날이 갈수록 조마조마하던 마음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단순해지고 편안하다. 무엇이든 자주 연습하고 반복하게 되면 담담해지는가 보다. 경험이 쌓이게 되면 그만큼 그 나름의 해결방안이 생기지 않겠는가.

늦게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긴 편지를 써 보낸 대학동문 선배가 진지하게 묻는다. 개원한 기분이 어떠냐고. 한마디로 공공병원에 근무하는 것은 연애. 개인 의원을 연 지금의 생활은 결혼인 것 같다고 답을 보냈다.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를 쓴다. 연애(戀愛)라는 한 자에는 마음을 나타내는 심(心)이라는 글자도 포함되어 있다. 연애는 감정이다. 마음, 연애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도 있지 않으랴 싶다.

결혼은 맺을 결, 혼인할 혼으로 실로 행복(吉)을 엮는 일이다. 실타래처럼 여러 가지 복잡하고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 얽혀있지 않던가. 여기저기 주변에 하나하나 챙기고 맞추어가면서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혼은 한번 하면 쉽게 푸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 같다. ​연애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알아가는 과정이지만, 결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지 않던가. 수십 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성격이 형성된 두 사람이 주위의 가족이나 지인들을 맞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면서 섞여가면서 참아내고 함께하는 일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아우르면서 두루두루 크게 볼 수 있는 태도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연애는 둘 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상대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란다. 반면에 결혼은 내가 내 뜻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가 없지 않던가. 상대를 먼저 생각해가면서 될 수 있으면 상대의 뜻을 받들어주면서 화평을 이루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되는 일로써 하나의 팀으로 모든 것이 평가된다. 연애는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만의 감정을 함께 느끼면 된다. 서로를 탐색하고 상대의 구석구석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봐야 하는 미분법이라고 하면 결혼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아닌 둘이 넷이 되는, 전체적으로 크게 보아야 하는 적분법이지 싶다.

4월이면 꽃이 피고, 9월이면 빨간 열매를 예쁘게 매달고 서 있는 나무가 자랑스럽다. 작은 정원의 한 귀퉁이에서도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서 오늘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주목의 열매 덕분에 추운 날에도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따스하게 보인다. 천연기념물로만 알았던 그 멋진 수형의 주목이 우리 아파트의 정원에 가만히 서 있었다니. 나무가 우연히 발견한 길손의 마음을 위로하듯이, 두 발을 딛고 선 나의 울타리 안에서 나름의 소임을 다하면서 순간순간 보람을 느끼고 싶다. 연애의 과정을 거쳐 결혼한 것 같은 우리, 모두 날마다 가슴 벅찬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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