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4 >신라의 여인 미실

발행일 2021-10-11 1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명의 왕 후궁이 돼 권력을 휘두른 미실

신라 진흥왕이 왕궁을 지으려다 절을 지었다는 신라 최대 규모의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조성했다. 기초석만 남은 장륙존상이 있었던 금당터에서 남쪽을 바라본 전경. 황룡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궁궐보다 절을 지어야 한다고 미실의 조언이 있었다.


세상의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다. 신라시대 역시 남자와 여자가 반반의 숫자로 구성된 사회였다.

신라를 이끌었던 세력은 귀족 중심에서 법흥왕과 진흥왕으로 이어지면서 차츰 왕권 중심의 정치로 변화해 갔다. 대부분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고 본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진성여왕을 비롯한 여왕을 제외하고도 신라의 중심을 흔들었던 여성들의 존재도 있었다.

신라 24대 진흥왕 당시 역시 귀족들의 힘이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때 나라의 중심을 크게 흔들었던 미실이라는 여인이 있었지만 이러한 역사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의 여인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었다. 진지왕, 진평왕까지 3대에 이은 왕의 여자로 나라의 살림살이에 적극 개입했다. 진지왕과 진평왕을 옹립하는 일에까지 주인공 역할을 할 정도로 신라의 국정에 깊이 관여했던 여인이다.

진흥왕이 왕권을 강화하며 정복군주로 나섰던 것은 나라를 튼튼하게 해서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왕의 여자로 군림했던 미실은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정치에 골몰했다. 이러한 미실의 꿈 때문에 신라의 국운이 크게 흔들렸다.

분황사와 월성 사이에 조성된 황룡사의 규모가 지금 보아도 황량할 정도로 부지가 넓다.


◆미실의 출생

신라시대 왕비는 전통적으로 진골 출신이거나 대원신통에서 교육을 받은 여인이 선택됐다.

대원신통 출신으로 왕의 여인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 미실이다. 미실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묘도부인의 딸이다. 묘도부인의 어머니는 옥진궁주로 그녀 또한 법흥왕의 후궁이었다. 미실은 그의 외할머니 옥진이 가슴으로 칠색조가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

대원신통의 후계자 옥진은 묘도, 사도, 흥도 세딸과 아들 노리부를 뒀다. 옥진의 딸들도 대원신통에서 철저하게 왕의 여인으로 길러졌다.

옥진의 큰딸 묘도는 미실을 낳고, 사도는 진흥왕의 비가 되어 진지왕을 낳았다. 흥도는 진지왕의 비이자 김용춘의 어머니인 지도부인을 낳았다.

미실은 그의 태몽처럼 외모가 출중했다. 외모뿐 아니라 그의 자태는 가히 따를 자가 없다할 정도로 빼어나 궁중에서나 궁 외에서도 그를 한 번 바라본 남자라면 다시 보고 싶어 할 정도였다.

황룡사 강당 뒤편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담장 흔적이 남아있다.


미실은 그의 외할머니 옥진궁주로부터 대원신통에서 철저하게 교육받으며 훈련을 통해 뛰어난 여인으로 성숙했다. 미실의 빼어난 미모는 그에게 복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시련을 주는 악재가 되기도 했다.

미실은 타고난 그의 미모와 재주로 이용을 당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 가는 철저한 자신의 무기로 활용해 나라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무서운 여자로 변해버렸다.

황룡사는 1탑 3금당으로 금당 좌우에 하나씩의 금당을 더 두고, 남쪽에서 북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순으로 일직선으로 가람을 배치했다. 뒤편 강당이 있었던 부지에 많은 석재들이 남아있다.


◆미실의 결심

미실은 대원신통에서 철저한 왕의 여인으로 길러졌다. 그의 빼어난 미모를 흠모한 진흥왕의 동생 세종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세종은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와 이사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종이 미실을 간절히 원하자 지소태후는 이사부와 의논하여 둘을 결혼하게 했다. 왕의 여인으로 수업을 받은 미실이 왕이 아닌 왕의 동생 아내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진골 출신이었던 지소태후가 대원신통 출신 사도왕후를 폐출하려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실이 이를 사도왕후에게 고자질 했다. 이 때문에 지소태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지소태후는 이를 괘심하게 여겨 세종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미실을 출궁시키고, 법흥왕의 동생 진종의 딸 융명을 세종의 새로운 아내로 짝지어 줬다.

황룡사 금당 뒤편에 남아 있는 강당 터. 기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세종은 미실을 잊지 못했다. 진흥왕 또한 동생의 아내인 미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미실은 궁 밖에서 화랑 사다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미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세종과 진흥왕은 사다함을 전쟁터로 내보냈다.

미실은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애타는 마음에 사다함을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 당시 미실의 노래는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이때 궁궐에서는 세종이 미실을 그리워하며 병을 앓아 누워 있었다. 아들을 생각한 지소태후는 다시 미실을 용서하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궁궐로 돌아가버린 소문을 듣고 절망하여 청오가를 부르며 슬퍼했다. 그리고 사다함은 친구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그를 따라 죽어버렸다.

이때부터 미실의 마음은 크게 변했다. 자신의 삶을 이래저래 휘젓는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혹독하게 다짐했다. 이러한 미실의 다짐이 진흥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진지왕,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왕실에 거대한 혼란을 가져오는 계기가 돼버렸다.

황룡사 북쪽 부지에 코스모스가 피어 한창이다. 일몰이 장관을 이뤄 작가들이 몰려드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진흥왕 당시 미실의 본격적인 밀실정치는 이맘때쯤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미실의 꿈과 신라

미실은 지소태후의 부름으로 이미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맞은 세종의 아내 자리로 돌아왔다. 미실이 다시 궁궐로 불려오면서 그는 화려한 팔색조가 됐다.

미실은 가장 먼저 남편이었던 세종을 명예를 얻어 권력을 잡기 위해 공을 세워야 한다며 전쟁터로 내보냈다. 세종이 전쟁터로 나간 사이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 돼 두 딸과 아들 수종전군을 낳았다. 진흥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실은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본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미실은 전쟁터에서의 힘을 얻기 위해 풍월주 설원랑을 정인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고, 10대 풍월주가 된 자신의 동생 미생랑도 정인으로 뒀다.

황룡사지 동북쪽 끝부분에 용도를 모를 큰 바위가 남아있다.


미실은 진흥왕의 큰아들이자 세자로 지명받아 왕위를 이을 동륜도 정인으로 맞아들여 딸 애송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진흥왕이 아끼던 태자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보명궁주를 마음에 뒀다. 미실이 지켜보고만 있을 여인이 아니었다. 태자 동륜이 제거됐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이 미실의 광폭한 행보를 눈치채고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실의 힘은 이미 진흥왕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진흥왕 또한 정복군주로 나섰던 꿈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백성들을 외면한 정치에서 벗어나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나라를 이루겠다는 꿈을 위해 미실의 흠을 탓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었다. 미실에 대한 징계를 소홀히 하는 틈에 미실의 계략은 진흥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미실은 그녀의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랑과 삶을 앗아간 권력에 맞서 이겨야 했다.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굴리는 것이 미실의 꿈이 돼버렸던 것이다. 미실은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진흥왕을 두고, 꿈은 물론 자신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미실은 그녀의 외삼촌이자 병권에 실력자로 등장하고 있던 노리부, 거칠부와 결탁하고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미실은 금륜을 정인으로 만들고 왕비가 되기로 했다. 미실은 금륜을 왕으로 추대하면 비로 간택해 줄 것을 약속했다.

황룡사 곳곳에 남은 석재들은 2천 년의 역사를 말하듯 갈라진 틈 사이로 화초가 자라기도 한다.


노리부와 미실은 진흥왕을 흥륜사에 유폐시키고, 금륜을 제25대 진지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금륜은 미실을 왕비로 간택하지 않고 횡음에 빠져 나라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미실은 다시 노리부와 결탁하고 진지왕을 제거하고, 진흥왕의 손자 백정을 진평왕으로 추대했다. 미실은 또 어린 진평왕의 후궁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노리부는 상대등의 자리에 올라 실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미실은 진평왕과의 사이에서도 딸 보화공주를 낳았지만 왕비로 간택되지는 않았다.

진평왕이 보명을 후궁으로 맞아들이자 미실은 영흥사로 들어가 승복을 입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606년 미실이 병으로 앓아누웠다. 미실의 정인이었던 화랑 설원랑이 영흥사로 달려와 미실이 죽을 때까지 간호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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