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하늘의 달은 하나인데 보는 장소에 따라 풍경은 달라진다. 지명에 달 월(月)자가 들어간 곳에 보름날 가보면 다른 곳보다 달의 풍경이 훨씬 좋다. 그래서 그런 곳에 둥근 달이 뜨는 밤이면 혼자 가만히 가서 소슬하게 내리는 달빛을 즐기다 올 때가 있다. 달은 어느 곳에나 뜨지만 그 달이 이 달은 아니다.

곡란골의 달은 어떤 날은 집 뒤 산에서 둥실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서쪽 용산 옆구리에서 작은 얼굴을 부끄러이 내밀 때가 있다. 보름달이 산 위로 둥그렇게 뜨는 날은 마당에 앉아 한참을 올려 보다가 자러 들어가는데 새벽에 잠이 깨어 창으로 난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느새 달은 마당 위에 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달이 없는 밤이면 달이 밝히던 그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인다. 수없이 반짝이는 그 별들을 올려다 보면 그리운 이들이 하나둘 스쳐 가는데 나이가 들어서인가, 그리움은 아련한 슬픔으로 번져간다.

저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있다는 칸트의 말도 하늘의 별빛을 올려다보면 공허해진다. 도덕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칸트가 말했지만 밤하늘의 별에는 개념이 없고 직관만이 빛날 뿐이다.

곡란골로 들어오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오직 직관만이 나의 의식을 관통하기를, 그리고 머무는 것 없이 모두 지나가기를 원했다. 개념이란 얼마나 공허하던가, 인간이 만들고 숭배하는 그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 바뀔 것이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직관만은 밤하늘의 별이나 달에서 나의 가슴으로 꽂혀 드니 나는 오직 직관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새벽이 돼 희미하게 밝아오는 지리산을 보면서 그 많은 개념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내 모습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언어의 개념들로 희미한 미명에 감싸인 지리산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자연은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언어를 품고 있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로 나는 언어의 난해한 개념들을 모두 버렸다. 지리산에서 밤새 불꽃 튀듯 나누었던 대화들은 새벽의 여명 앞에서 의미 없는 말들이 돼 버렸던 것이다.

내가 살아갈 시골의 터를 찾을 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몇 가지의 고려 사항이 있었다. 우선 밤이 되면 천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캄캄해지는 곳, 더불어 완전한 적막이 대지 위로 내려앉는 곳, 집은 단출한 단층집이면 좋겠고, 기왕이면 나무로 지은 집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사람들의 내왕이 번잡하지 않도록 마을에서 살짝 떨어지면 좋을 것이고, 고요는 타인에 의해서 자주 깨어지지 않으면 더 좋을 것이다. 곡란골은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었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달빛은 아름다웠고 집 근처의 보안등이 꺼지는 시간이면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난다. 완전한 적막이 어둠과 함께 내려앉아 내가 내 몸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해질 무렵이면 동네 골목에는 아주머니 두어 분이 수다를 떠는데 심심하면 슬며시 끼어들어도 된다. 적막하되 외롭지 않고, 고요하되 우울하지 않다.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되 단절되지 않았고, 자연과 친하되 침잠하지는 않는 것이다.

한낮의 고요가 정점에 달할 때쯤이면 앞 들판에서 경운기 소리가 들린다. 내려다보면 마을은 깊은 적막에 든 듯 하지만 과수원마다 사람들이 있고, 들판의 곡식들은 때맞추어 익어 간다. 딱 이 정도의 적막,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고요와 소란이 날마다 곡란골에 펼쳐진다.

그러다 밤이 되면 그 모든 소란은 완전한 적막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캄캄한 대지 위에는 별이 빛난다. 소란스럽게 놀다가 저녁때가 되면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모두 집으로 돌아가던 어릴 적의 추억이 그 적막에 소환된다.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불이 켜진 집에는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던 그 때, 나는 그때의 시간을 찾아 곡란골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때 산 너머에서 둥실 떠오르던 달과 까만 하늘을 촘촘히 수놓던 별들은 그대로이다.

사는 게 무엇이 두려운가. 세상을 모르던 그때 우리를 반겨주었던 하늘의 달과 별이 여전히 우리를 비춰주고 있으니 다시 한번 살아볼 만 하지 않은가. 낮은 지붕을 이불삼아 별자리를 찾다 보면 세상의 근심이 사라진 고요가 찾아든다.

천영애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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