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2>법흥왕

발행일 2021-09-27 08:12:0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법흥왕이 불교 공인·율령 반포로 국가체제 정비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신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23대 법흥왕의 릉은 시가지에서 한참 서쪽으로 벗어난 서악동의 선도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사적 제17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율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해 현대국가적인 개념으로 나라의 틀을 다졌다. 일부 학자는 법흥왕 때부터 화랑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나라의 동량이 될 청소년들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며 양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왕위를 이으면서 본격적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고, 건원이라는 연호를 지어 나라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왕권을 강화해 귀족정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려고 했다.

특히 법흥왕은 상대등이라는 제도를 신설해 왕권강화에 나섰으며, 가야를 병합해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대내외적으로 신라의 국격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법흥왕의 노력도 결국 귀족들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흥륜사에서 감금돼 승려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법흥왕릉으로 가는 길은 국도에서 선도산 자락으로 제법 들어와 소나무와 밤나무 등이 우거진 등산로로 제법 운치있게 조성돼 있다.


◆법흥왕

신라 23대 법흥왕은 지증왕의 아들로 이름은 원종이다. 514년에 왕위를 물려받아 540년까지 26년간 신라 역사에 획을 긋는 큰 업적을 남겼다.

법흥왕은 지금의 국방부와 같은 병부를 설치하고, 대신들의 의복을 정리하며 최초로 상대등 제도를 실시하며 왕권 강화에 나섰다. 관리와 백성들의 상벌을 다스리는 율령을 제정 반포하면서 나라의 기강을 엄격하게 했다.

율령은 죄의 종류에 따른 형벌에 대한 기준은 물론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제도를 포함한다. 중앙관직과 지방 행정제도까지 정비해 귀족 중심의 정치에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마련한 것이다.

상대등은 신라의 민주적 행정제도인 화백회의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치로 법흥왕 때에 처음 시행한 제도다.

법흥왕이 이차돈의 목을 치게 해 하얀 피분수가 솟구치는 등의 이변이 일어났다.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소금강산에 자추사를 지어 그를 추모했다. 후에 백률사로 이름이 바꿨고, 백률사 금당 바로 앞의 암벽에 삼층석탑이 암각화로 새겨져 있다.


왕은 또 건원이라는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금관가야를 정복해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왕권을 강화했다.

무엇보다 불교를 공인해 국가의 통치이념을 일원화 하고, 불교를 통한 건축과 문화예술의 발전, 문자 보급, 국민들의 정서적 교육 등을 통해 국가 성장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법흥왕도 귀족들의 세력에 밀려 말년에 스스로 지었던 최초의 신라 국찰 흥륜사에서 승려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소금강산 백률사는 경주 시가지에서 가깝다. 국도와 연접한 주차장에서 10분 정도만 부지런히 오르면 사찰에 닿는다. 백률사로 오르는 길은 계단과 가파른 경사길이다.


◆신라의 불교 공인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법흥왕 15년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신라에도 이미 눌지왕 당시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서 굴을 파고 은밀하게 불교를 전파했다.

당시 고구려에서 옷과 향을 신라의 궁궐에 보내왔지만 향을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묵호자가 향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태우면 좋은 향기가 나는데 부처님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전했다.

마침 그때 눌지왕의 딸이 병이 들어 의원들이 고치지 못했다. 묵호자가 향을 태우며 기도를 올려 공주의 병을 고쳤다.

그 이후 소지왕 때 아도화상이 또 모례의 집을 찾아와 경전으로 불교를 전해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은 낮은 산이지만 바위로 돼 있어 경치가 좋고, 경주 시가지가 훤하게 조망된다.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삼기 위해 불교를 공인하고 싶었지만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때 이차돈이 “바라옵건대 소신의 목을 베시어 신하들의 불평과 의심을 잠재우시고,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소서”라고 간청했다.

왕은 “내가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국민들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자 함인데 어찌 백성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그럴 수는 없소”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차돈은 “하잖은 제 하나의 목숨으로 불교의 심오한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아름다운 도리를 살릴 수만 있다면 크나큰 영광입니다”며 “소신은 부처님의 법을 일으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제가 죽을 때 분명 신령스러운 힘으로 이적이 나타날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이차돈의 목을 치자 목에서 하얀 피가 솟구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다.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내렸다. 이를 지켜본 귀족들과 백성들은 왕의 명에 따라 불교를 받아들이게 됐다.

소금강산은 동서남북으로 등산로가 조성돼 시민들이 공원처럼 이용하고 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 등산객들이 하나둘 돌을 얹어 조성한 돌탑이 쌍으로 보인다.


신라 불교 공인의 의미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 불교의 부처님을 신성시 하면서 국왕이 부처님과 상응하는 권력을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 대신과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중앙집권식 권력구도를 갖추게 했다.

또 일관성을 가진 국가 경영철학으로 자리잡아 국가운영의 방향성을 제시해 효율적인 국가관리를 가능하게 했다. 일반 백성에게도 문자를 보급해 정서적인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했으며, 불교를 중심으로 건축기술과 문화예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불교는 또 대내외적인 문화예술을 비롯한 외국과의 종합적인 교류 활성화, 국론 통일을 통한 삼국통일의 근간이 됐다. 귀족들의 일방적인 권력에 대한 견제를 가능하게 하면서 소통의 길을 열어 일반 백성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으며 삼국통일의 근간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소금강산 동북쪽 9부 능선에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경주 동천동마애삼존불좌상. 많이 훼손돼 있지만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법흥왕과 뿌리깊은 귀족세력

신라를 세우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끈 이들이 박·석·김씨 등의 왕위를 이어오는 성씨의 왕족들이라고 한정해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실질적으로 초창기 신라를 움직였던 세력은 박혁거세를 왕위에 올렸던 육부촌의 사람들이다.

육부촌장을 비롯한 그들의 세력이 왕족과 연결고리를 맺거나 독립적으로 성장해 신라를 귀족정치 형태로 운영했다.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왕권을 강화했던 법흥왕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던 진흥왕 시대에도 귀족들의 세력이 왕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흥왕이 불교를 마음대로 공인하지 못하고, 아끼던 신하 이차돈의 목을 공개적으로 베어야 했던 것도 귀족들과 힘겨루기의 한 방편이었다.

법흥왕은 고민이 깊었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든 외세에 맞서는 병법이든 나라의 중요한 시책을 결정하는 일은 사사건건 귀족들의 벽에 부딪쳐 마음대로 시행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지증왕 때부터 충신처럼 가까웠던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세력조차 왕권에 사사건건 견제세력으로 존재하며 왕권의 절대적인 힘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법흥왕은 나라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절대적인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왕권의 권력 집중화를 위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를 위해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이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면서 문화, 예술 등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육각형의 이차돈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가장 신임했던 신하 이차돈과 밤낮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귀족들의 기를 꺾고 왕이 마음대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중앙과 지방을 다스리는 조직부터 개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법흥왕의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구구만장 꽃을 피웠다.

결국 대신들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차돈의 희생을 담보하기로 했다. 당시 이차돈은 대신들 중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리고 이차돈은 불교를 미리 받아들여 생각도 깨어있었으며 누구보다 희생정신이 강했다.

그리해 법흥왕 15년을 맞는 새해 궁중회의에서 이차돈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널리 퍼뜨려야 합니다”며 대궐이 떠나가도록 쩌렁한 목소리로 왕에게 불교 공인을 건의했다.

법흥왕은 각본대로 “그대는 불교가 아무리 뛰어난 이론을 가진 종교라 하지만 어찌해 검증도 되지 않은 법문을 가지고 국교로 인정하라고 하는가”며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부정했다.

이차돈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큰 목소리로 “폐하 부처님의 은혜로움은 만백성을 이롭게 할 것입니다. 제 목을 치신다면 부처님이 이적을 드러낼 것이니 그에 따라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나라는 강하고, 백성들이 복되게 살 수 있게 하소서”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왕은 “모든 대신들도 이차돈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며 동의를 구하고 이차돈의 목을 치게 했다.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법흥왕은 날개를 달았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흥륜사를 짓고, 백성들이 불교를 믿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했다.

또 이를 통해 왕은 율령을 공포하고, 상대등 설치를 비롯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식 왕권을 강화하는데 일차 성공했다.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몇몇 귀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귀족들의 힘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해 부강한 신라로 나아가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의 힘은 귀족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귀족들은 왕이 이사부와 거칠부를 대동해 흥륜사 법회에 참여하러 간 틈을 이용해 흥륜사에 감금시켜 버렸다. 법흥왕은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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