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9)
눈물은 왜 짠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고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다. ‘눈물은 왜 짠가’를 ‘바닷물은 왜 짠가’로 바꿔놓아도 될까. 둘은 대체될 수 없다. 눈물은 감성적 현상이고 바닷물은 이성적 존재이다. ‘눈물은 왜 짠가’는 가슴을 울리는 서정시가 되고 ‘바닷물은 왜 짠가’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과학적 탐구영역이 된다. 눈물이 짠 이유를 묻는 것은 눈물을 맛봤다는 뜻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다. 감읍하거나 슬퍼서 눈물을 흘릴 만한 사연이 있다는 고백이다, 생각의 고리는 꼬리를 문다. 그 숨은 사연이 궁금해진다. 시제 ‘눈물은 왜 짠가’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엄마를 이모 집에 모셔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애틋한 사랑은 오히려 더 신비로운 힘을 발휘한다. 주체할 수 없는 효심과 서러운 마음이 뒤죽박죽 뒤섞여 시너지를 일으킨다. 잔뜩 부풀어 올라 건들기만 하면 터질 지경이다. 주인아저씨의 따스한 배려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트리거다. 절로 눈물이 흘러내릴 법하다. 몰래 눈물을 훔치는 과정에서 짭짤한 눈물 맛을 봤을 터다. 어떻게든 자식 입으로 고깃국물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모정이 눈물겹다. 거짓말이 나쁘다지만 염치를 알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착한 마음이 흔해빠진 스테레오타입을 깨고 남는다. 감정을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모습이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엄마 사랑은 역경에서 더욱 빛난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