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1>지증왕

발행일 2021-09-13 08:22:2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지증왕 신라 국호 짓고, 농경법 보급하며 시장 열어 경제 활성화 도모

신라 1천 년의 왕궁으로 외적의 침략에 점령 당하지 않았던 월성.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의 모습.


신라 22대 지증왕은 64세가 되던 해 500년에 왕위에 올라 14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자로 지도로, 지대로, 지철로왕 등으로도 불렸다. 아버지는 습보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이다.

눌지왕의 아들이 자비왕이고, 자비왕의 아들이 21대 소지왕이다. 지증왕은 소지왕의 4촌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지증왕이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하면서 신라의 국호를 지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으로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신라시대 월성을 쌓으면서 성이 오래도록 튼튼하길 기원하며 사람을 제물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최근 발굴된 월성의 서쪽 성벽 발굴 현장.


지증왕은 소를 이용한 농경법을 보급해 농업의 발전을 가져오고, 이사부 장군을 파견해 우산국을 정벌하게 했다.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흡수해 지방의 군현을 정비하고,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고를 개발하기도 했다.

서라벌 동쪽에 시장을 열어 경제적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넉넉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제도를 정비하기도 했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쓰도록 명해 나라의 역사를 견고하게 이어가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지증왕은 어릴 때부터 왕의 외손으로 왕이 될 수 없는 처지이지만 왕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키워 4촌 소지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추정으로 스토리텔링을 한다.

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편지가 출토됐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연못 서출지의 제방 산책로.


◆자비왕과 소지왕

신라 20대 자비왕은 눌지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실성왕의 딸인 아노부인이다. 아버지 눌지왕이 장인어른인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대를 이었다.

자비왕은 458년 왕위에 올라 479년까지 21년간 재위하면서 서라벌의 행정구역을 방과 리로 획정했다.

자비왕 당시에는 왜적들이 전투선 100척을 끌고 동쪽 해안으로 침략해 월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으로 월성이 크게 파손돼 자비왕은 궁성을 명활성으로 옮기고 대대적인 월성 보수공사를 벌였다.

또 왜적의 공격에 대비해 바다에서의 전투를 위한 전투선을 건조하고, 해안에서 접근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해안과 연접한 지역에 성을 쌓았다. 이후 왜구들의 침략을 쉽게 물리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했다.

자비왕은 또 백제, 고구려와도 경계를 두텁게 했다.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인 강원도에 삼년산성과 일모성 등을 높이 쌓아 침략에 대비했다.

자비왕 시대에는 외적들의 잦은 침략전쟁으로 백성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백결선생의 거문고 연주와 방아타령도 이때 만들어진 서민들의 고달픈 삶이 담겨진 예술작품이다.

신라 21대 소지왕은 자비왕의 맏아들로 479년에 왕위를 이어받아 500년까지 21년이나 왕좌에 있었다. 소지왕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사람을 대할 때 공손해 칭찬을 받았다.

명활산성은 경주보문관광단지 서쪽에 연접해 있는 나지막한 산을 둘러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신라시대 산성이다. 높지 않은 산성이지만 사방이 훤하게 조망돼 월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명활산성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보문단지의 전경.


도시를 잇는 도로를 개설하고, 시장을 열어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소지왕은 백제와는 결혼동맹을 맺어 친화정책을 펼쳤다.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소지왕은 나을신궁을 지어 나라의 명운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이때부터 왕의 즉위식을 나을신궁에서 가졌는데 이러한 풍습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지왕은 자비왕 때부터 시작한 월성 보수공사를 마치고 명활산성에서 월성으로 다시 돌아와 천년왕궁의 터전을 마련했다.

소지왕이 남산 나들이에 나섰다가 까마귀를 만나 서출지에서 편지를 얻고,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갑을 향해 화살을 쏘아 반란을 도모하던 궁녀와 복을 비는 중을 쓰러뜨리고 목숨을 구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소지왕은 가끔 변복을 하고 거리로 나가 백성들의 형편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다. 그러다 벽화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됐다.

궁 밖으로 나와 벽화를 만나곤 하다가 결국 벽화를 궁으로 불러들여 아들을 낳았다.

벽화가 아들을 낳으면서 귀족들의 세력 싸움이 심각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왕이 죽음을 당하는 반란으로 번지게 됐다.

서출지 연못에 연꽃이 가득하고 서편 끝에는 조선시대에 지은 정자 이요당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지증왕의 꿈

지증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체격이 우람한 눌지왕의 외손이어서 외할아버지를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지증의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로 어려서부터 궁궐에서 자라면서 보기 드물게 학문은 물론 무가의 여식과 함께 무술까지 익혔다.

지증은 활달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잠시라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궁궐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이사람 저사람을 사귀면서 잡학까지 다양하게 몸으로 배워 자신의 재주로 삼았다.

눌지왕은 맏아들 자비의 아들 소지가 있었지만 활달하며 자신을 빼닮은 지증을 어여뻐하며 곁에 두는 시간이 많았다. 물론 외사촌 간인 소지와 함께하는 시간이었지만 지혜나 힘 겨루기에서도 지증이 월등하게 뛰어나 가끔 눌지왕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다.

명활산성 북문지와 이어지는 산성이 복원되고 있다.


지증이 12살이 되던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와 같은 멋진 왕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지증의 어머니는 순간 얼굴이 사색이 돼 아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지증의 어머니는 먹던 밥을 그대로 둔 채 아이를 다그쳤다.

“큰일 날 소리다. 네 외삼촌과 외사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왕이 될 생각은 꿈에서도 해서는 안된다”면서 “그런 말은 다시는 꿈에서라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 무렵 눌지왕이 병색이 짙어 큰아들 자비에게 왕위를 이양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지증의 어머니는 가만히 아버지 눌지왕을 찾아가 엎드려 부탁을 했다. “아버님 지증이 넓은 들에서 저와 함께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외곽지에 조그마한 거처를 마련해 주십시오”라며 졸랐다.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155호 고분에서 발굴된 천마가 새겨진 말다래. 천마총 내부에 복원 전시되고 있다.


딸의 의중을 헤아린 눌지왕은 가야 출신 중에도 인물 됨됨이가 믿음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지혜롭고, 무술 실력이 뛰어난 노솔 장군과 30여 명의 호위부대를 대동해 흥해지방에서 살도록 배려를 했다.

흥해지방으로 이사를 하고 한동안 불만스러워하던 지증도 노솔 장군의 아들과 어울려 무술을 익히고 사냥을 하는 즐거움에 빠져 나날이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지증이 18세가 될 무렵에는 이미 주변 가까운 마을을 비롯해 제법 멀리 떨어진 영천까지 친구들을 사귀어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증이 허물없이 지내며 친구처럼 따르는 무리가 200명은 훨씬 넘어섰다. 지증이 어려움에 처해 손을 내민다면 달려올 친구들이 수백 명에 이르러 여느 장군의 세력보다 못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지증과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살다시피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가야 출신 노솔 장군의 아들 노영주와 이사부는 둘도 없는 단짝으로 매일 무술을 익히고, 사냥을 같이 즐기면서 호연지기를 키우는 사이였다.

대릉원의 155호 고분 천마총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경주 관광자원으로 발굴됐다. 고분의 내부 유물의 규모를 감안하면 피장자의 체격이 거대하다고 판단돼 지증왕의 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지증에게 노영주와 이사부가 찾아와 월성 공사를 진행하는데 함께 가서 일도 배우고, 서울 구경도 하자고 졸랐다. 자비왕이 왜구와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 월성 보수공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지증은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씀 드리고는 100여 명의 벗을 모아 월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을 마치고 저녁마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일의 진척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서울의 지리와 정황들을 자세하게 파악했다.

일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소지왕의 후궁 선혜부인과 늦게 후궁으로 들어와 아들을 낳은 벽화부인의 세력들이 왕위를 잇기 위한 암투를 벌였다. 이들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들어나 궁궐에서 무기를 들고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러한 정보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던 지증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궁으로 진입해 싸움으로 지친 두 패거리를 진압했다.

그리고 이미 상처를 입은 소지왕을 감금하고 실질적인 왕업을 이어가면서 갈문왕으로 등극했다. 지증은 이미 계획해 왔던 일이라 인사, 병무 등의 내부 업무를 자신의 수족으로 갈아 치웠다. 주변 지역의 갈등을 심판하는 일에도 스스로 나서 왕의 업무를 추진했다.

500년 소지왕이 병으로 죽자 지증은 3년가량의 사실상 섭정 기간을 끝내고, 나을신궁에서 신라 22대 지증왕으로 즉위식을 가지고 514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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