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치, 천천히 파도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바다의 아코디언」 (문학과지성사, 2002)

바다는 잃어버린 고향이다. 해서 바다는 엄마 품처럼 그립다. 그 앞에 서면 낯익은 먼 기억이 알알이 쌓이고 아련한 추억이 다정스레 넘실거린다. 피폐한 영혼과 지친 몸으로 찾아가도 늘 기꺼이 받아준다. 파락호로 돌아와도 보듬고 토닥여주는 고향사람마냥 그저 정겹다. 지지고 볶는 세상사와 절연하고 악취 나는 인간사와 초연한 바다는 험한 몸을 씻어주고 신선한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꺾인 구부정한 어깨를 펴고 비록 너덜너덜 갈라졌을 터지만 먼 수평선을 향해 맘껏 소리를 내질러본다.

바다 앞에 서면 누구랄 것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파도소리가 반주를 하고 갈매기가 추임새를 넣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를 찾은 시인은 엄청난 성량으로 바다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아코디언을 만난다. 갈매기소리에 반주를 맞춰주고 파도소리에 한껏 호응한다. 몇 겁이 지나가도 결코 지치거나 병들지 않는다. 아코디언 소리에 신이 난 듯 파도가 흥겹게 일렁거린다. 주름져 펼쳐진 개펄은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다. 아코디언이 접혔다 펼쳐지는 사이 인간은 주름진 개펄처럼 생멸을 거듭할 따름이다.

자연은 있는 듯 없는 듯, 바다는 생긴 그대로, 그 주인공이자 배경이다. 그 속에 서 있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바다의 아코디언이 한번 접혔다 펼쳐지면 한 생애가 훌쩍 지나가버릴 참이다. 추억과 고집 중에 그 어느 것인들 영겁을 견뎌내고 있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만경창파에 일파만파로 울려 펴지게 펼칠 수 있을까. 채석장에 들어와 숨을 돌리던 바닷물이 아코디언 소리에 피로를 잊는다. 해는 수평선을 넘어가려는 듯 주단을 깔고 붉은 가락을 내뿜고 그제야 채석장에 쉬던 바닷물이 돌아가며 반짝반짝 손을 흔든다.

이젠 마음을 가라앉히고 석양을 바라본다. 갈매기도 숨을 죽이고 파도도 눈길을 모은다. 무지개를 쫒듯이 지난 세월동안 추구했던 부귀영화도, 심신을 옥죄었던 백팔번뇌도 모두 덧없다. 뻘 위에 드러난 무수한 주름마냥 다 부질없다.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무상한 삶이다. 비록 해는 저물더라도 자연의 교향악을 끝까지 즐길 터다. 파도에 주름이 씻겨가고 파도소리에 아코디언소리가 잦아든다.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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