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부터 36명의 김씨 왕 세습||내물왕의 아들 눌지 실성왕 죽이고 왕위에 올라

▲ 신라시대 56대왕 중에서 박씨를 시작으로 석씨에 이어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김씨 왕 세습을 시작했던 계림 서쪽 사적 제188호 내물왕릉.
▲ 신라시대 56대왕 중에서 박씨를 시작으로 석씨에 이어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김씨 왕 세습을 시작했던 계림 서쪽 사적 제188호 내물왕릉.


내물왕은 신라 17대 왕으로 356년에 즉위해 402년까지 46년 동안 재위하면서 신라 1천 년 사직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내물왕부터 52대 효공왕까지 36명의 왕이 김씨로 왕위를 이어가는 기반을 마련했다.



신라 56명의 왕은 박·석·김씨의 3개 성을 가진 인물이 차지했다. 처음에는 박씨, 그리고 석씨에 이어 김씨가 500년 이상 신라를 줄곧 다스렸다. 신라의 왕족으로 남은 세 성씨는 협력과 견제를 하는 세력으로 서로 도와 왕이 되기도 하고, 다른 힘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박씨에 이어 9대 벌휴왕부터는 석씨가 왕위를 이으면서 김씨 세력과 손을 잡았다. 석씨 왕들의 왕비로 김씨 가문이 많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석씨 마지막 왕인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미추왕의 외손이자 김씨였던 내물왕이 왕위를 이어 본격적인 김씨 세습제가 시작됐다.



내물왕에 이어 그의 사촌이었던 실성왕이 등극하고,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데 대한 복수극으로 내물왕의 아들인 조카들을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이는 오히려 실성왕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일로 되돌아왔다.



▲ 경주 고분공원 가운데 대릉원의 금관을 비롯한 3만 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가장 규모가 커 황남대총으로 이름이 붙은 고분. 눌지왕 아니면 실성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이 쌍분이 황남대총.
▲ 경주 고분공원 가운데 대릉원의 금관을 비롯한 3만 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가장 규모가 커 황남대총으로 이름이 붙은 고분. 눌지왕 아니면 실성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이 쌍분이 황남대총.


◆내물왕의 정치

내물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백성들을 위한 제도를 다양하게 만들어 추진했다. 왕위에 올라 첫 번째로 전국에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한 조사에 나서 홀아비와 홀어머니, 부모가 없는 아이, 자식이 없는 늙은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나눠주도록 했다.



내물왕은 또 효성이 뛰어나고 능력이 있는 백성은 신분의 비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고 시행하는 등으로 인재 등용문을 넓혔다.



내물왕은 태풍, 가뭄과 병충해 등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배분하고,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했다.

또 죄수들을 풀어주면서 바르게 살도록 위로하기도 했다.



당시 백제 근초고왕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왜와 함께 신라를 자주 침범했다. 왜의 침략에 대비해 토함산에 허수아비 군사를 세워 적군들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 눌지왕의 동생들이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이를 슬퍼하자 김제상(다른 설화는 박제상)이 고구려와 왜로 가서 인질을 구해냈다.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의 동생을 구해내고, 또 다른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김제상.
▲ 눌지왕의 동생들이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이를 슬퍼하자 김제상(다른 설화는 박제상)이 고구려와 왜로 가서 인질을 구해냈다.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의 동생을 구해내고, 또 다른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김제상.


왜군들은 백제의 힘을 믿고 신라를 수시로 공격했다. 내물왕 9년과 38년에 왜구들이 10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와 왕궁을 포위했다. 내물왕은 바로 적과 싸움을 하지 않고 성문을 닫고 그들이 지쳐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다 후퇴하는 왜구를 뒤따라가 크게 무찔렀다.



왜구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와 손잡고 이들을 물리치며 삼국 간의 견제 정국을 이끌었다. 내물왕이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면서 왕족이었던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 경주와 경계지점 울산 두동면의 박제상기념관.
▲ 경주와 경계지점 울산 두동면의 박제상기념관.


◆실성왕과 눌지왕

신라 18대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 대서지 이찬이다. 어머니는 석씨로 이리부인이다. 실성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왕은 내물왕 당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내물왕이 죽음을 앞두고 있던 401년에 돌아왔다. 내물왕이 죽자 바로 대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



실성왕은 402년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 복호와 미사흔을 고구려와 왜로 볼모로 보내버렸다. 복호와 미사흔은 내물왕의 아들이자 눌지왕의 동생들이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큰 아들 눌지가 늠름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부터 신망을 받는 것이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 박제상을 추모하기 위해 박제상기념관에 건립한 박제상 추모비.
▲ 박제상을 추모하기 위해 박제상기념관에 건립한 박제상 추모비.


실성왕은 고구려에 10년이나 볼모로 있었다. 왕은 당시 가까이 지냈던 고구려의 대신들을 사신으로 초청했다. 실성은 총애하는 대신을 보내 고구려 사신들을 후하게 대접하며 은근히 눌지를 처치해 달라는 청탁을 하게 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눌지를 보내 고구려 사신들을 마중하게 했다. 눌지는 고구려 사신들을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특유의 호탕함으로 격의 없이 사흘 동안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교분을 쌓았다.



이때 고구려 사신 최고의 책임자로 왔던 고동석은 상황판단이 냉철하고 분명한 장수였다. 고동석은 부하로부터 실성왕의 밀지를 미리 받았지만 눌지와 3일간 함께 묵으면서 눌지의 진실된 인간됨을 파악하고 진정으로 감명을 받았다. 눌지의 친화적이고 호탕한 성격이 고동석과 고구려 사신들을 감동하게 해 진짜 친한 친구가 돼버렸다.





▲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로 떠나간 지아비 박제상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다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되어버린 박제상의 부인과 딸.
▲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로 떠나간 지아비 박제상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다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되어버린 박제상의 부인과 딸.


고동석이 실성왕을 만나러 가기 전에 눌지에게 왕의 밀지를 받은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제안을 했다. “실성왕은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우리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직접 실성왕을 제거한다면 당신을 신라의 왕으로 인정하고 형제의 연을 맺겠다”고 제안했다.



눌지는 평소 실성왕이 자신을 싫어하고, 동생들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보내는 등의 정치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고구려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눌지는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다음 고구려 사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실성왕을 제거하기로 약속했다. 고구려 사신 일행은 눌지와 함께 월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동궁에 도착해 여정을 풀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다.





▲ 고구려에서 돌아와 집에 들르지도 않고 왕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왜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이 친척들의 만류에도 돌아오지 않고 두 다리를 뻗치고 버티었다는 곳 벌지지 표지석.
▲ 고구려에서 돌아와 집에 들르지도 않고 왕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왜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이 친척들의 만류에도 돌아오지 않고 두 다리를 뻗치고 버티었다는 곳 벌지지 표지석.


실성왕이 밀지를 보냈지만 눌지가 죽지 않고 고구려 사신들과 함께 돌아온 것을 보고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사신들이 왕에게 밀지를 보내 왕이 보는 자리에서 눌지를 처단하겠다며 만찬장을 마련하라고 말하자 이에 안심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의 제안이 오히려 신명나고 좋을 것 같아 좋다고 답신을 보내고는 궁에서 거창한 만찬장을 마련했다.



눌지는 미리 자신을 따르는 대신과 장수들에게 거사일정을 알려주고, 궁의 내부와 외부에 민첩한 군사들을 배치해 철저하게 대비하게 했다.



실성왕이 만찬장에서 고구려 사신들을 맞이하면서 아주 반가운 척을 하며 직접 술을 권했다. 술잔이 두어순배 돌고 난 다음 고구려 사신을 대표한 고동석은 실성왕을 향해 “당신은 우리에게 신뢰를 잃었소. 우리와 함께 손잡고 갈 사람은 눌지라고 생각하오”라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이를 신호 삼아 눌지가 일어나 실성왕을 향해 “왕은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고, 대신들을 앞세워 자신의 배만 불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으니 백성들 보기에 부끄럽고, 고구려 대신들을 맞이할 체면이 없다”며 칼을 받게 했다.





▲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물들.
▲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물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성왕은 주변을 돌아보며 “왕을 핍박하는 눌지를 처단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눌지가 이미 심어 놓은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주변을 에워싸고, 고구려 대신들조차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는 모습을 본 신라 대신들은 모두 눌지 편에 서버렸다.



실성왕을 포박해 옥에 가두고, 고구려 대신들의 추대까지 받은 눌지는 신라 19대 왕으로 등극했다. 눌지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왜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어 눌지왕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한편 수레를 개발해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고,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눌지왕과 김제상

왕위에 오른 눌지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베풀었다. 고구려와 친화정책을 펼치는 한편 백제와 왜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해 신라의 국방을 튼튼하게 했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면서 눌지와 두터운 정을 나누던 고구려 고동석과 사신들이 나이가 들어 죽거나 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 삼척의 성주 허삼직이 사냥을 하다가 국경 지역에서 고구려 군사 둘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빌미로 고구려가 신라 곳곳을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혔다.



눌지왕은 우선 고구려에 볼모로 있는 동생을 데려오고 난 다음 전쟁을 하기로 하고 김제상을 아무도 모르게 고구려로 파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구려 왕실에서는 복호를 신라의 대신으로 우대하며 우호적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신라 국경에서 다툼이 심각하게 진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김제상은 상인의 복장으로 고구려에 숨어들어 복호를 만나 위급상황을 알리고 밤을 틈타 신라로 도망하는데 성공했다. 고구려 대신 몆 명이 복호의 도망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들은 평소 복호와 두터운 정을 나누던 의리를 생각해 모른 척 하며 오히려 복호의 도주를 은밀하게 도왔다.



김제상은 눌지왕과는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죽마고우였다. 왕의 고민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김제상은 왕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복호를 데려오는데 성공하고, 바로 행장을 꾸려 왜로 떠났다. 그러나 김제상은 미사흔을 왜에서 구해 신라로 보내고는 왜구들에게 잡혀 죽음을 맞았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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