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하회구곡

발행일 2021-09-05 13:05:0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하회구곡(河回九曲)

당당한 기와집, 옹기종기 둘러앉은 다정한 초가집, 넓고 호젓한 골목길….

조선조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과 징비록(국보 132호)을 집필한 서애 류성룡 형제로 대표되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 가장 한국적인 곳이어서 멀리 영국 여왕이 들르기도 하고(1999년),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 등 소중한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한 가치가 널리 인정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2010년) 하회마을! 그러나 풍산류씨 세거 600년 역사를 간직한 채 흐르는 낙동강 정경을 대표하는 하회구곡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병산, 남포, 수림, 겸암정, 만송, 옥연, 도포, 화천, 병암 등 절경 아홉 곳을 이르는 하회구곡은 류운룡(1539~1601)의 후손, 남옹 류건춘(1739~1807)에 의한 것이다.

조선조에 성행했던 구곡문화는 남송 때 성리학의 대가 주희의 무이구곡에서 유래한 것, 구곡은 탐욕을 버리고 도(道)를 찾는 아홉 물굽이의 대명사이다.

퇴계의 도산 구곡가, 이이의 고산구곡가 그러한 것처럼 류건춘 또한 ‘무이구곡가’를 본받아 하회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그것은 심심 파적의 음풍농월이 아니라 성리학이 궁구하는 진리를 체현(體現)하려는 삶의 자세였다. 200여 년 전 그날,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의 물빛은 어떠했을까? 초야의 한 선비가 시로 읊은 하회구곡을 거닐어본다.

“낙동강의 근원 있는 물 동쪽에서 흘러내리고/ 병풍바위의 우뚝한 절벽이 그것을 에워쌌네/ 구름 낀 병산에 서원 서니 강이 섬처럼 둘러/ 일곡이라 이름난 터에 버드나무 나부끼누나”(1곡: 병산)

하회구곡의 첫 번째인 병산은 하회마을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만대루에서 바라볼 수 있는 병풍바위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김진홍 기자
동쪽에서 흘러내리는 낙동강을 보며 근원을 생각하는 류건춘의 눈에 비친 강은 생명의 토대이자 문명의 뿌리, 만대루에 올라 하회마을의 역사를 떠올렸으리라.

물과 땅이 얼싸안고 누워 있는 태극형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삶의 터를 옮겨온 곳, 강변 모래사장은 가뭄을 막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태극의 형상은 홍수의 범람을 피하기에 족했다.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을 이룬 산 아래 정경은 태극지형과 연화부수형의 형세. 길지(吉地) 중의 길지가 아니었던가.

“5리의 긴 시내 포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운무가 반쯤 걷혀 삼필봉이 드러나 보이네/ 중류에는 나무꾼 피리소리 홍교(虹橋)에 이어지는데/ 이곡이라 두견화가 푸른 남기(嵐氣) 속에 빼어나구나”(2곡: 남포)

남포는 현재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 첫 번째 취수장 인근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무지개 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포는 병산에서 3.5㎞ 정도 내려간 지점인 취수장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무지개 다리를 보며 땅의 시름이 하늘과 이어지는 나무꾼의 피리소리를 들었으리라.

“노을 속 오리 나는 빛이 물 서쪽에 비단 같은데/ 갈고리처럼 연결된 돌 잔도는 하늘 오르는 사다리에 닿았구나/ 세찬 물결 속의 지주(砥柱) 바위 높다랗게 서 있는데/ 삼곡이라 흰 모래밭에 기러기 떼 내려앉는구나”(3곡: 수림)

3곡 수림의 저녁노을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비쳐 황금색을 연출하고 있다.
겸암정과 원지산 사이, 상봉정 뒤쪽에 있었던 숲, 수림은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다웠다. 수림에 떨어지는 저녁노을 수림낙하(水林落霞)와 어우러진 기러기 떼 내려앉는 백사장은 하회 16경 중 하나였다.

“굽어보니 푸른 물결 부딪혀 역류하며 흘러가는데/ 하늘거리는 바위틈 대나무들 정자 옆에 서 있네/ 낚시 바위는 보였다 말았다 여울 소리는 오열하네/ 사곡이라 선조의 정자 십경에 들기에 손색이 없도다”(4곡: 겸암정)

4곡 겸암정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맏형인 류운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화천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 서쪽, 옥연정사 맞은편에 자리 잡은 겸암정은 류성룡의 맏형 류운룡이 1567년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 국가민속문화재 제89호이다.

“강의 반은 솔 그늘이 드리워 묶인 배를 덮고/ 삼동에는 눈이 덮이며 봄에는 봄기운을 띠네/ 꾀꼬리와 학의 울음소리 바람결에 뒤섞이는데/ 오곡이라 서리 맞은 단풍 적벽 앞에 붉구나”(5곡: 만송)

5곡 만송은 하회마을에서 각종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1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강둑에 조성한 숲이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1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강둑에 조성한 숲은 하회별신굿의 주요 무대. 하인 초랭이의 양반 풍자는 양반과 하인 사이의 벽을 허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놓은 경계를 지워 너와 나를 하나로 만드는 마을 공동체의 계기가 됐던 것.

“백 길의 부용대가 옥처럼 맑은 물에 비치고/ 푸른 절벽 끊어진 곳에 물소리가 요란하네/ 나루 입구에서 맞이하고 돌아갈 때 전송하니/ 육곡이라 능파대에서 뱃노래가 들리는구나”(6곡: 옥연)

6곡 옥연의 깊은 물 색조는 옥과 같아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직접 이름을 붙였다.
옥연을 굽어보는 옥연정사는 국보 132호 징비록의 산실이다. 옥연(玉淵)은 서당 앞을 흐르는 깊은 물의 색조가 옥과 같아서 서애 선생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책의 이름에 그 뜻이 들어 있듯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역사적 소임의 산물이었다.

옥연정사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이 없었다면 선생이 피로 기록한 16권 7책의 국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옥연에 맑게 씻은 붓을 들어 유비무환의 소중함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강 모서리의 한 조각 외로운 섬 푸르고/ 지나가는 나그네 그림자 백사장에 길구나/ 깊은 가을 누런 숲은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칠곡이라 농부들 노랫소리 원근에 들리네”(7곡:도포)

7곡 도포는 현재 사라지고 없는 백사장이다.
옥연 하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백사장이다. 한 조각 외로운 섬, 그 위에 어린 나그네 그림자를 보고 있으니 사라질 도포의 아득한 훗날의 운명을 류건춘은 눈치 채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서원을 품은 맑은 시내 백사장을 빙 둘렀는데/ 산의 이름은 화산이고 아래 시내는 화천이라네/ 명륜당 높은 곳에 청금(靑襟)의 선비들 모여 있으니/ 팔곡이라 글을 읽는 소리 북쪽 물가까지 들리네”(8곡: 화천)

8곡 화천 너머 겸암 류운룡 선생을 배양하고 있는 화천서원이 멀리 보이고 있다.
고려의 국운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일이었다. 민심은 흉흉하고 백성들은 저마다 급급하게 살 길을 궁리하던 때였다. 입향조 공조전서 류종혜공이 화산에 올라 눈여겨 화천을 바라본다.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이루어 서로 만나듯 선비들 모여들어 글 읽는 소리 강물처럼 흘러 북쪽 임금 사는 조정까지 닿는 꿈을 꾸었으리라.

“사방으로 돌던 물결 곧장 아래로 내달리고/ 너럭바위 앞의 깎아지른 절벽 병풍 문이 되었네/ 깊은 못의 용이 포효하여 종담(鍾潭) 골짜기 갈랐으니/ 구곡이라 바람 세차고 밝은 태양 어둑어둑하네”(9곡: 병암)

하회구곡의 마지막인 병암은 ‘S’자로 흐르는 낙동강이 화천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급하게 돌아가는 방향에 위치해 있다.
화천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급하게 돌아 방향을 잡은 암벽이다. 선유줄불놀이의 흥취가 최고조에 오르도록 상민들이 절벽 아래로 불붙인 솔가지를 던지며 ‘낙화야!’를 외치는 소리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하다.

구곡시를 아우르는 총론 성격인 〈합곡시〉에서 류건춘은 “그림 같은 절벽 풍경 읊은 열여섯 편의 시/ 뱀에 사족 더하기 어렵고 물은 헤치기 어렵네/ 못난 나는 만년에 주자의 무이구곡시 좋아하여/ 감히 강가 거처를 작은 무이에다 견주었네”에서와 같이 松林霽雪(만송정 숲에 눈 개인 경치), 赤壁浩歌(부용대 앞 뱃노래 경치), 渡頭橫舟(옥연정 앞강을 건너는 배 구경), 平沙下雁(드넓은 강변에 내려앉는 기러기 구경) 등 하회 16곳의 절경을 노래한 부친의 시를 따를 수 없다며 효를 갖추고, 감히 강가 초라한 거처를 무이에다 견주었다며 한껏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보인다.

‘무이’란 무엇인가? 류건춘이 거닐었던 강가에 서서 밤하늘을 떠올려본다. 강물은 도도하게 한여름 밤을 흘렀으리라. 강물 가득 달걀 불을 밝혔으리라. 만송 백사장엔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으리라. 그런 날이면 청홍색 띠를 두른 초랭이가 보름달 기울도록 어깨춤을 추었으리라.

양반들의 축제와 상민들의 놀이가 어떻게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양반들은 경비를 대고 상민들은 노동으로 답한 문화적 품앗이 덕분이었다. 가재와 용이 한 하늘 아래서 흙탕물을 일으키는 작금의 사정에 견줄 때 신뢰와 공감과 소통의 품앗이 문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반상의 벽이 높았던 당대에 조화로운 공동체의 삶을 살았던 하회마을의 그날은 선비들이 다투어 꿈꾸던 무이의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

“구곡장궁안활연 상마우로견평천 어랑갱멱도원로 제시인감별유천(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에서와 같이 그곳은 별천지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이었으니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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