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국의 왕자 석탈해 신라 남해왕의 사위로 왕이 되다



▲ 경주 소금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4대왕 탈해왕릉.
▲ 경주 소금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4대왕 탈해왕릉.


신라 4대 임금은 2대 남해왕의 사위인 석탈해다. 남해왕의 아들 3대 유리왕이 죽자 왕의 매부였던 석탈해가 62세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왕위를 잇는 권력 이양은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순조로웠다. 남해왕이 궁중에서 중요한 일을 척척 처리하는 똑똑한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탈해는 매부인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

탈해왕은 또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현명한 그를 태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이을 것을 희망했지만 알지 또한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파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박혁거세 이후 남해왕, 유리왕, 석탈해왕, 파사왕으로 이어지는 169년 동안 왕위가 순조롭게 이양되면서 제도적인 정비를 비롯 군사력을 키워 외세의 침략을 막는 등으로 나라의 운영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탈해왕은 용성국의 왕자로 신라에서 자리를 잡아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마한, 백제, 가야, 왜구 등의 침입을 받았지만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치고 나라를 안정적이며 평화롭게 운영했다.



특히 탈해왕의 백성 사랑은 남달라 죽은 이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이 됐다.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까지 토함산에 석탈해왕의 사당을 지어 그를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왔다.



▲ 탈해왕릉 앞에 오래된 소나무숲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 탈해왕릉 앞에 오래된 소나무숲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서라벌 입성

석탈해는 용성국의 다섯 왕자 중 네 번째 왕자다. 용성국에서는 왕자가 18세가 되면 군사적 세력이 될 100명의 친위부대를 붙여준다. 그리고 왕위를 이을 제목을 친위부대의 전력과 왕자의 지혜를 평가해 선정했다.



석탈해는 다섯 왕자 중에서 단연히 두드러지는 무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왕자들 간의 불필요한 견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탈해의 지혜는 형제들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깊었다. 왕과 일부 대신들은 이미 이러한 탈해의 자질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있었다.



반면 둘째 왕자 고루는 체격이 우람하고 무술 실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지만 과격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을성 없는 급한 성격은 직속 친위대 부하들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탈해가 10살이 되기 전부터 고루는 왕좌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리부터 경쟁상대를 없애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과 왕비는 물론 대신들까지 왕자들의 전쟁을 막기 위해 고루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에 이르렀다.







▲ 석탈해왕이 완하국에서 처음 상륙했다고 전해지는 하서항.
▲ 석탈해왕이 완하국에서 처음 상륙했다고 전해지는 하서항.


탈해가 성장하면서 뛰어난 자질이 고루의 눈에 드러나 제거될 것을 왕과 왕비는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왕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스승을 탈해에게 보내 무예수업과 인성적인 교육까지 은밀하게 진행하게 했다. 덕분에 탈해는 타고난 자질을 십분 발휘해 그를 가르치는 스승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 같은 탈해의 놀라운 성장을 스승은 왕에게 은밀히 보고했다. 탈해의 빠른 성장이 화가 될 수 있다는 걱정도 함께 전했다.



탈해는 또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자신이 익힌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술로 둔갑시켜 친위부대원 중에서도 뛰어난 장군 10명에게 아무도 모르게 개별적으로 전수했다.



탈해는 22세가 되던 해 왕과 왕비를 방문해 새해 인사를 드리고, 용성국을 떠나 다른 나라를 건설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용성국을 이끌 훌륭한 형들이 있고, 형제들과 다투기는 싫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허락을 얻어내고는 하직 인사를 올렸다.





▲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입구의 홍살문.
▲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입구의 홍살문.


탈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용성국에서는 왕이 돼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나라를 개척할 계획을 친위부대 수석 보좌진과 협의하며 진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왕위 계승자 결정을 위한 행사가 진행되기 전에 나라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탈해와 100명의 친위부대는 무기와 식량을 5대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큰 파도에도 견디기 쉽게 바람이 거세어지면 5대의 배를 하나로 결합하는 지혜 또한 탈해의 머리에서 나왔다. 6개월의 긴 항해 끝에 탈해군단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아름다우며 농사하기 좋은 땅 서라벌에 당도했다.



하서항에 당도한 탈해는 어민들에게 가져온 보석들을 나눠 주며 친화정책을 펼쳐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친화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탈해의 지혜에 토착주민들도 금방 하나가 돼 새로운 기술을 배워 고기를 잡고, 농사를 배웠다.



수시로 노략질하며 사람까지 상하게 하던 왜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탈해군단은 쉽게 토착주민들을 흡수했다. 탈해의 친위부대는 하서지방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 탈해왕릉 남쪽 인근에 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 숭신전이 있다.
▲ 탈해왕릉 남쪽 인근에 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 숭신전이 있다.


◆이국에서 온 석탈해 왕이 되다

탈해군단은 하서지방에서 고기잡이와 농사를 지으며 세력을 키웠다. 타고난 무인체질에다 익힌 신출귀몰한 무예실력을 발휘해 마을을 지키는 사병들을 훈련시켜 왜구들의 노략질도 단숨에 차단하며 평화로운 마을을 꾸렸다.



탈해는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서라벌 진출을 꿈꾸게 됐다. 용성국을 떠나오면서 나라를 경영하리라던 꿈을 그는 하루도 잊지 않고 있었다. 토함산 정상에서 사방을 살피며 나라를 경영하는 뜻을 펼칠 대계를 하나하나 구상했다.



탈해는 30세가 되기 전에 하서지방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서라벌로 들어가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 석탈해왕의 유허비각 앞에 백일홍이 만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 석탈해왕의 유허비각 앞에 백일홍이 만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신라 2대 남해왕이 혁거세의 뒤를 이어 나라를 꾸려가고 있을 때였다. 남해왕도 아버지 혁거세를 닮아 우람한 체구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부촌을 포함해 20여 촌을 아우르는 나라를 경영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힘겨워 했다. 이때 지혜로우며 뛰어난 전략가 탈해가 신의 게시처럼 떡 나타나 나라를 경영하는 일을 맡겠다고 했다.



탈해가 병력을 기르고, 백성들의 넉넉한 삶을 위한 농사법, 지휘체계를 갖추고, 나라의 위엄을 세우는 법을 만들어 직접 나라를 운영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남해왕은 똑똑한 탈해에게 나라의 일을 하나씩 맡기다가 끝내 모든 일을 맡기고 의지했다.



탈해는 나라의 중심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농사지으며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는 일까지 담당하는 관리를 두고 일목요연하게 처리했다. 특히 병사들을 훈련하고 관리 통솔하는 일은 자신의 친위부대 장군이 담당하게 했다. 신라의 실질적인 군사력은 이미 탈해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 삼국유사에는 석탈해왕이 죽은 뒤 문무왕에게 자신의 뼈를 토함산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토함산 정상에 석탈해왕을 추모하기 위해 운영했던 사당터가 2020년 10월 발굴됐다.
▲ 삼국유사에는 석탈해왕이 죽은 뒤 문무왕에게 자신의 뼈를 토함산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토함산 정상에 석탈해왕을 추모하기 위해 운영했던 사당터가 2020년 10월 발굴됐다.


남해왕은 당돌하면서도 똑똑하고 지혜로운 탈해를 사위로 삼았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나라일을 맡기고 아들을 제쳐두고 사위 탈해를 태자로 지정해버렸다.



남해왕이 탈해가 왕위를 잇도록 유지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탈해는 남해왕의 큰아들이자 처남인 유리가 먼저 왕위에 오르도록 양보하고 천거했다. 유리도 탈해의 지혜와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경영하는 최고의 리더는 매부 탈해가 맡는 것이 옳다고 우겼다.



그러나 지혜로운 탈해는 아직도 박씨 성을 가진 왕족들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끝내 자리를 사양하고 유리왕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신라 3대 유리왕 대에도 탈해는 나라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했다. 관리의 인사문제는 물론 재정과 군사분야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토함산 정상 석탈해왕 사당터 가는 길.
▲ 토함산 정상 석탈해왕 사당터 가는 길.


유리왕이 33년 동안 재위하고, 석탈해는 62세가 되어서야 4대 왕으로 등극해 그의 꿈을 이뤘다.



석탈해왕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친위대장 구파에게 나라의 경영에 대한 상당부분을 맡겼다. 그리고 용성국에 사신을 보내 문물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용성국과의 교류는 농산물과 각종 제조 특산물은 물론 해외 세력들의 동정까지 파악해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우호국으로 국력을 키워 동반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석탈해는 왕위에 오른 늦은 나이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이어갔다. 신체적인 수련에 이은 하루 한 시진의 꾸준한 면벽참선은 탈해를 육천통에 이르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탈해왕은 신라가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큰 나라로 성장 발전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끝내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 걸 알게 됐다. 이 때문에 탈해는 죽어서 토함산을 지키는 신이 돼 나라를 지키기로 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희들을 있게 한 탈해다. 내 뼈를 토함산 정상에 묻어라. 왜구들의 침략과 노략질을 막아 백성들을 지켜주겠다”라고 했다. 문무왕은 꿈에서 들은 탈해왕의 분부에 따라 토함산에 왕의 뼈를 화장해 안치하고, 사당을 지어 제를 올리며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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