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하늘을 읽다…경북 봉화군 녹동리사와 직방당

발행일 2021-08-22 17:10:34 댓글 1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12>경북 봉화군 녹동리사와 직방당

자연과학 분야 천재 천문학자 배상열 선생 제향공간인 녹동리사

삼각법으로 낮이면 시간 측정하고 밤이면 별자리 관측한 직방당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고개 너머 절정에 위치한 경북 봉화군에는 예로부터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그중 석평리 유록마을 출신의 천재 천문학자인 괴담 배상열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넓은 평야인 호평들에서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붙여진 호골산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유록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400년 동안 이어진 흥해 배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추원사, 유산서당, 쌍절려, 임연재 신도비 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배상열 선생이 천체를 관측하던 직방당과 녹동리사가 남아있다.

배상열 선생의 자는 군필, 호는 괴담으로 1759년 12월25일에 안동부 내성현 유록(현 경북 봉화읍 석평리 유록)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과학 분야에 천재적인 지식과 이해 능력이 있었으며 성리학에도 뛰어났다.

특히 16세의 어린 나이에 천체를 관측하는 선기옥형을 제작해 주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780년 이후에는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 돼 학문을 닦았고 ‘사서찬요’, ‘서계쇄록’, ‘도학육도’, ‘사서의의’, ‘성리찬요’ 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괴담유고’에 수록된 발문에는 선생에 대한 학문과 덕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괴담은 만년에 대산 이상정을 가까이하여 겨우 3일간 수업을 받았고 8년 만에 죽었다. 괴담의 학문은 박식하면서 요점이 있고 자세하면서 범범하지 않고 착실하면서 절실하니, 스스로 이를 평생의 사업으로 여겨 매일 쉬지 않고 전진하였기 때문이다. 장차 여유 있게 지내면서 생각하여 찾고 곰곰이 사색하며 노력을 경주하여 그가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렸다. (중략) 괴담은 매우 가난하여 혹은 날을 건너 식사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종이는 때때로 친구나 공부하는 학동들이 연습하는 것을 빌려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 다른 사람이 가져갔거나 흩어졌다고 한다.(1808년 황용한 지문)’

‘옛날 나의 당형 소암공이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괴담 배군은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부모에게 효순하며 독서를 좋아하고 사색을 잘하였으니 참으로 뜻을 돈독하게 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여서 그 진취를 헤아릴 수가 없다. 당시 나는 오랜 벼슬살이로 외지를 떠돌아 그의 가슴속에 있는 뜻을 물어볼 수 없었으나, 마음속으로 우리 마을에 인물이 있음을 기쁘게 여겼다. 기유년(1789년) 봄에 괴담이 서울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며칠을 함께 묶었는데 그의 행동거지가 침착하면서 자상하고 말하는 것이 우아하고 조리가 있어 단정한 법도가 있는 집안의 모범이었다. 그 학업을 묻자 매우 겸손하여 아무것도 없는 듯하여 더욱 그를 중히 여겼다. 그가 떠날 때 원대한 학업에 힘쓰도록 격려했다.(1808년 전 대사간 김한동 발문)’

괴담 배상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지역 선현으로 제향하기 위해 지어진 녹동리사.
◆녹동리사

녹동리사는 괴담 배상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지역 선현으로 제향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강학 및 제향공간이다.

그를 추모하고 기리던 후학들과 후손들이 서원을 건립하려고 했으나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숙원 사업으로만 지내왔다. 이후 배상열의 손자인 배약주(1817~1882년)가 건립에 전념했으며, 사림에서도 서원 건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봉화현감 의 도움을 이끌어 냈다. 건립 터는 배상열의 유허지로 정하고 이 지역 인근 사림들의 동의를 받아 확정했다. 봉화 녹동리사 건립의 실무를 주도할 임원들을 선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건축비를 마련하면서 1831년에 완공됐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향사 기능이 중심이 된 서원이나 정사가 많아지는데, 봉화 녹동리사 건립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의 한 현상이었다. 서원은 원래 유림의 사표가 될 인물을 제향하기 위해 엄격한 공론을 통해 건립됐는데 현종과 숙종조에 사족들의 세력기반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학맥과 문중에 의해 남설됐다. 이러한 첩설의 폐단은 영조 때도 횡행해 1727년 12월11일에는 삼남에 어사를 파견해 증축한 서원을 조사하고 한 사람에 대해 여러 개로 거듭 설치한 서원에 대해서 모두 훼철하라고 명했다.

1864년 8월28일에는 이미 사사로이 세운 서원에 대해서는 철폐 명령을 내렸고 1871년 4월28일 한 사람은 한 서원에 배향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외의 중첩되는 서원은 철폐하도록 했다. 사액서원이라고 할지라도 중복되는 것은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했다. 이를 서원철폐령이라고 한다. 봉화 녹동리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무너지고 강학영역인 강당을 남겨서 현재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종도리 묵서를 통해 건립시기가 명확하게 확인되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녹동리사는 서원의 건립에서 훼철되는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는 문헌 자료들이 남아 있으며 그에 대한 고문서 및 유산, 유물 등도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녹동리사를 운영하기 위해 규정과 역할을 기록한 문헌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록은 ‘괴담입향시일기’에 제례 절차에 따라 제사를 지낸 경과가 기록돼 있다. 묘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제사의 절차를 기록한 ‘묘사시홀기’는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절차와 술을 올리는 절차, 절하는 순서 등을 차례대로 기록한 것이다. 봉화 녹동리사는 이러한 제례와 관련된 문서들이 남아있으며 현재까지 제사를 이어오고 있어 조선시대 제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녹동리사는 현재 남아있는 현판 및 증언(배기면씨)을 통해 훼철 이전의 서원배치를 유추할 수 있어 그 가치 또한 인정받고 있다. 훼철 이전의 배치를 살펴보면 정면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배면으로는 산이 위치하고 있어 경사진 지세를 따라 남동향을 바라보고 있다. 앞쪽은 강학공간을, 뒤쪽은 제향공간을 일직선으로 배치해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배치형태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봉화 녹동리사는 전저후고 지형의 경사면에 세웠으며 전학후묘의 배치형태를 가진 전형적인 서원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후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과정도 있었지만 건립당시 위치와 재료가 변함이 없으며 건물이 가지고 있는 강학적 기능 및 제향공간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배 선생이 조성한 직방당.
◆직방당

직방당은 배 선생이 조성한 지당으로 ‘주역’ 곤괘·문언의 ‘경으로 안을 바르게 하고, 의로 바깥을 바르게 한다’에서 전해진 명칭이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괴담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배상열이 직방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녹동리사가 건립된 후인 17세기경으로 확인된다.

직방당은 삼각법을 이용, 고도를 측정해 전답 면적 계산을 하는데 이용됐다. 또 낮에는 해시계로 시간을 측정하고 밤이면 별자리를 관측한 장소로 전해지고 있다.

직방당은 녹동리사 남동쪽에 위치하며 형태는 원형에 가깝게 구성돼 있다. 크기는 가로 8m 세로 8m이며 호안의 재료는 4~5단의 석축으로 쌓아져 있다. ‘괴담유고’에 따르면 직방당 건립 당시 옆에 큰 홰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지 않으며 다른 식종의 두 그루가 직방당 옆에 위치하고 있다.

‘서계쇄록’은 상편과 하편로 구성돼 있다. 상편에는 기본적인 한자의 육서 및 성운학 등에 대한 기록이 돼 있다. 하편에는 계산법 등 현재의 수학에 대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과 천문 관련 저작을 검토한 전 서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이용복 교수는 “그의 이론은 현대 천문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며 “천체 운행의 원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나름의 체계를 세운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직방당에서 하늘을 관측하고 땅을 측량한 천문관측 기구, 천문서적인 기삼백해 및 기해제도 등 관련 저서는 현재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역학서인 역설제도와 하도지도, 성리학 관련 도학육도 등 다양한 자료 1천여 점이 있어 당시의 천문학 연구 성과를 짐작게 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직방당은 그의 학문적 업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며 한국 과학사에 끼친 영향과 문화사적 의의를 규명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로 건축적 가치가 있다.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인 선기옥형.
◆선기옥형

선기옥형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기구로서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통해 시간과 절기를 측정하기 위해 제작됐다. 혼천의, 혼의, 혼의기라고도 한다. 선기옥형은 임금에게는 처세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됐고 학자들에게는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기본 도구로 활용됐다.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1433년에 왕명을 받아 중추원사 이천, 호국 장영실 등이 최초로 제작했다고 한다. 괴담 배상열 선생은 두 번에 걸쳐 선기옥형을 제작했다. 처음에는 16세인 1774년에 도산서원을 방문해 간재 이덕홍이 제작한 것을 본 이후에 만들었다고 하나 이것은 전해지지 않고 21세인 1779년에 다시 제작해 1785년에 보수한 것이 전해진다.

선기옥형은 북두칠성의 제1성에서 제4성까지를 선기(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라고 하며, 제5성부터 제7성까지를 옥형(옥으로 만든 천체 관측기구)이라 한다. 선기옥형은 육함의, 삼신의, 사유의, 저좌로 3부분으로 구성됐다. 육합의는 지평환, 자오환, 적도환의 3개환으로 구성돼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관찰한다. 삼진의는 황도환과 백도환으로 구성되며 해, 달, 별을 관찰한다. 사유의는 적경쌍환, 극축, 규관으로 구성되며 천체를 관측하는 규관을 통해 동서남북 사방을 관찰한다, 선기옥형의 십자받침 바닥면에는 ‘기해초을사중이재악수용유미정복당사선수량재경조’라는 23자의 묵서기록이 있다. 이는 1779년에 처음 만들어 1785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다.

그가 제작한 선기옥형은 구조가 전통적인 혼천의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적도단환에 표기된 눈금과 별자리가 다른 선기옥형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차이점으로 적도단환의 내면에 한지를 붙여 위쪽에는 28수에 해당하는 적도수도를 1도 간격으로 눈금을 표기했다. 바로 밑에 28수를 구분하는 각각의 칸을 만들어 28수 성수도의 명칭을 표기했다. 그리고 성수도 명칭 아래로 명칭에 해당하는 별자리 그림을 표시해 놓았다. 이와 같은 형태는 조선시대 제작된 선기옥형의 적도단환 표기 방법으로 유일한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혼천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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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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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d*****2021-08-25 15:54:46

    조선시대 우리나라 천문학자료 발굴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