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 덕망 높아 왜구와 이웃나라들 침범못해

▲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의 왕으로 61년 재임하고 죽어 묻힌 무덤. 시신이 5부분으로 나눠져 봉분을 5개로 조성했다고 전한다. 알영부인과 2대, 3대, 5대왕이 함께 묻혀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의 왕으로 61년 재임하고 죽어 묻힌 무덤. 시신이 5부분으로 나눠져 봉분을 5개로 조성했다고 전한다. 알영부인과 2대, 3대, 5대왕이 함께 묻혀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박혁거세는 신라 최초의 왕이다.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적인 요소가 짙은 설화로 여러 가지로 전해오고 있다.

군주로서 역할은 덕이 넘치는 리더로 평가되며 그를 추모하는 사당 이름도 숭덕전으로 부른다.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은 아주 민주적이었다.

육부촌장들의 만장일치에 따른 추대한 것이다.

또 공개적으로 진행된 종합무예대회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낸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며 따르도록 공정한 절차를 거쳐 왕을 선발해 박혁거세는 덕이 있는 왕이 됐다.



박혁거세는 삼국유사와 사기에서도 신으로 묘사되는 부분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탄생설화도 신비롭지만 그의 죽음 또한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경주 오릉이 그의 무덤이라는 설과 혁거세왕을 포함 2대, 3대, 5대왕 그리고 알영부인의 무덤이 한 곳에 조성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박혁거세는 탄생과 죽음에 대한 신비스런 설화에 걸맞게 그의 리더십은 덕이 많은 훌륭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61년이나 왕좌에 있으면서도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듣는 일보다 칭송을 받는 덕망이 높은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백마가 알을 품고 있었던 우물이 있었던 나정. 발굴에서 2천700여㎡에 달하는 건물의 흔적과 우물, 회랑지가 나왔다. 박혁거세 탄생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였다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곳이다.
▲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백마가 알을 품고 있었던 우물이 있었던 나정. 발굴에서 2천700여㎡에 달하는 건물의 흔적과 우물, 회랑지가 나왔다. 박혁거세 탄생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였다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곳이다.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 탄생설화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 탄생설화는 여러 가지로 전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와 사기에서 전하는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육부촌장들이 나라의 왕을 추대하기 위해 모였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남산에 올라 신에게 제사를 올리려고 했다. 그때 나정에서 이상한 빛이 보였다. 촌장들이 내려가보니 백마가 알을 지키고 있었다. 백마는 인기척에 하늘로 날아가고, 알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촌장들은 하늘에서 내려준 왕이라고 여기고, 그 자리에 왕궁을 짓고 아이를 키워 초대 왕으로 추대했다.(삼국유사)’



‘진한의 고허촌 소벌공 촌장이 양산기슭 나정에서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소벌공이 시종을 데리고 가까이 가보니 말은 간데없고,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어떤 일일까 궁금해 하는데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를 곱게 싸서 동천에서 목욕을 시켰다. 아이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나면서 향기가 났다. 새와 짐승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하늘과 땅에서도 우르릉 소리가 나며 움직였다. 소벌공의 집에서 자란 혁거세는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다. 육부촌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힘을 합쳐 주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맞서기로 하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삼국사기)’



▲ 오릉은 9만㎡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공원으로 조성해 사적 제172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오릉 앞에 조성된 연못.
▲ 오릉은 9만㎡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공원으로 조성해 사적 제172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오릉 앞에 조성된 연못.


◆신라 건국

기원전 70년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 추석절을 기해 고성숲에서 육부촌을 비롯한 진한 전체지역의 후기지수들이 겨루는 종합무술대회가 열렸다.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행사였다. 무술대회는 힘과 무기를 다루는 기량, 지혜를 가늠하고 리더십을 평가할 수 있는 개인전과 단체전 등으로 진행됐다.



대회는 육부촌장들이 협의체를 구성해 심사장이 돼 진행과정을 총괄하며 분야별 승자를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무예대회는 치열하게 치러졌다.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분야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이가 있었다. 이제 갓 15세에 이른 박혁거세였다. 그는 남산자락에서 서남대사의 지도를 받아 이미 십팔반무예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전술전략과 육서까지 완전히 이해하는 출중한 인재였다.



▲ 오릉 동쪽에 박혁거세를 추모하는 사당 숭덕전이 있다. 숭덕전에 이르기 위해 홍살문, 영숭문, 숙경문을 지나야 한다. 신도와 인도를 구분해 두고 있는 영숭문.
▲ 오릉 동쪽에 박혁거세를 추모하는 사당 숭덕전이 있다. 숭덕전에 이르기 위해 홍살문, 영숭문, 숙경문을 지나야 한다. 신도와 인도를 구분해 두고 있는 영숭문.


육부촌장들은 거리낌없이 만장일치로 박혁거세를 대회 우승자로 뽑았다. 그리고는 다시 회의를 열었다. 15세 약관의 젊은이가 나라를 다스릴 왕이 되어도 괜찮을 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촌장들은 다시 새로운 결론을 내렸다. 육부촌에서 다듬어진 무술과 전술전략, 진법, 독약제조법, 예법 등에 대해 각 부에서 1~3년씩 완벽하게 습득하게 한 후에 왕으로 추대키로 했다.



이미 갖춘 무예와 지혜를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육부에서 전해오는 비법들을 빠르게 습득했다. 13년 만에 육부의 모든 비법들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혁거세는 더욱 성장해 자신만의 무예를 창안해 육천통의 경지에 이르렀다.



기원전 57년 혁거세가 태어났던 나정에 신라최초의 궁궐을 짓고 왕으로 즉위하는 식을 가지며 신라가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의 형태를 갖춘 나라로 첫 출발을 했다.



▲ 오릉 동쪽에 알영부인이 탄생한 곳으로 알영정이 비각과 함께 보호시설로 조성돼 있다.
▲ 오릉 동쪽에 알영부인이 탄생한 곳으로 알영정이 비각과 함께 보호시설로 조성돼 있다.


◆덕왕의 죽음

서라벌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밤마다 혁거세가 궁궐을 빠져나가 어딘가를 다녀오는 눈치를 챈 알영부인의 고민이 깊어졌다. 하루는 혁거세가 밖으로 나갈 때 파리로 변해 따라나갔다. 혁거세가 타는 말꼬리에 붙어있었는데 말은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옥황상제의 궁궐에 도착했다.



땅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올 혁거세를 축하하는 잔치였다. 갑자기 옥황상제가 축배를 들던 잔을 내려놓고 버럭 화를 내며 “혼자 오기로 한 약속을 왜 어긴 것이냐”라며 혁거세에게 호통을 쳤다. 혁거세는 당황해 하며 혼자 왔다고 말했다. 옥황상제가 빗으로 말꼬리를 빗겨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파리가 떨어지더니 알영부인으로 변했다.



알영부인은 옥황상제에게 “제 생각이 좁아 남편을 의심하고 따라왔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옥황상제는 알영부인을 땅으로 내려보냈다. 다음 날 서라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



혁거세의 몸이 나누어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알영부인도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이 무덤을 만들었지만 거서간의 몸이 자꾸 흩어져 어쩔 수 없이 다섯 개의 봉분으로 무덤을 조성했다. 그래서 박혁거세 왕릉을 오릉이라 부른다.





◆왜구들도 감복한 박혁거세

박혁거세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백성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도 그를 존경했다. 혁거세는 육부를 돌아보며 농사를 가르치고, 뽕나무를 심게하는 등 땅을 효율적으로 경작하게 했다. 나라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됐다.



왜구들도 혁거세의 덕치에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고, 이웃 변한의 여러나라들이 항복해 왔다. 낙랑도 혁거세의 덕치에 두려움을 느끼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며, 마한도 호공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고 평화롭게 지냈다.



혁거세는 즉위하면서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농법을 전파하는 한편 군사제도를 도입해 조직적인 훈련을 거쳐 해안과 경계지역을 지키게 했다. 특히 경계병들은 순찰을 돌며 특별한 위기에 대해서는 연기, 전서구 등을 통해 순식간에 궁궐까지 보고하는 체계를 갖췄다.



▲ 박혁거세 추모사당 숭덕전 남쪽의 홍살문.
▲ 박혁거세 추모사당 숭덕전 남쪽의 홍살문.


박혁거세가 즉위한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명활산성에서 붉은 연기에 이어 푸른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어 전서구가 날아들어 하서해안으로 왜구가 처들어온다는 급보를 전해왔다.



박혁거세는 특별훈련을 받은 무사들을 빠르게 뒤따르게 하고는 축지법으로 일각도 되지 않은 시간에 하서지방에 도착했다. 50여 명의 훈련을 받은 정예화된 왜구들이 해변에 막 상륙하려던 찰나였다.



서라벌 땅에 상륙하는 왜구들은 저마다 특출한 솜씨를 가진 잘 훈련받은 닌자들이었다. 그러나 닌자들은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혁거세의 손에 제압되었다. 그들이 쓰는 창과 도, 검, 도끼, 갈고리 등등의 무기와 특별히 제조한 비기들조차 혁거세의 옷자락 하나 상하게 하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강한 혁거세의 위세에 50여 명의 닌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 공원으로 조성된 오릉. 공원에는 고라니가 살고 있어 운이 닿으면 쉽게 고라니를 볼 수 있다.
▲ 공원으로 조성된 오릉. 공원에는 고라니가 살고 있어 운이 닿으면 쉽게 고라니를 볼 수 있다.


뒤이어 도착한 서라벌의 특수부 대원들은 이미 굴복하고 엎드린 왜구들을 보고 내심 겨루어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이들은 혁거세의 지도를 받아 고도의 무사로 성장한 정예부대로 이미 상대가 될만한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죽어라 훈련해왔던 그들이라 혈기에 한 번 싸워보고 싶어했다.



혁거세는 마을에서 잔치를 열어 왜구들이 배부르게 먹게 했다. 그리고 부대원들과 개인전, 단체전 등으로 무예를 겨루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줬다. 술까지 얻어 마신 왜구들도 자신들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지만 혁거세의 지도를 받은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속절 없이 당했다.



잔치가 거의 파할 무렵 박혁거세왕은 닌자들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침범해온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엄연히 서라벌의 땅이고 서라벌 백성들이 땀 흘려 일해 먹고 사는 곳”이라고 못박았다.



이어 “그러니 너희들은 너희들의 땅에서 열심히 일해 먹고 사는 길을 가야 한다. 한 번 더 노략질을 일삼는 날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뼈 속으로 파고들 만큼 차가운 소리로 질책했다.



왕은 닌자들이 타고 온 배 위에 적당한 양식을 실어주며 다시는 서라벌 땅을 기웃거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왜구들은 모두 엎드려 절하며 감사하고, 다시는 서라벌 쪽으로 발걸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물러갔다.



이러한 사태는 이웃 지방으로도 금새 소문이 퍼져 왜구는 물론 서라벌로 침범하려는 나라는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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