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지역의 육부촌장 만장일치로 나라 세워 평화지킬 것 약속

▲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신라 천년의 문을 열었던 육부촌장들을 제사하는 양산재를 2019년부터 육부전으로 개칭했다. 육부전으로 들어가는 문 대덕문.
▲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신라 천년의 문을 열었던 육부촌장들을 제사하는 양산재를 2019년부터 육부전으로 개칭했다. 육부전으로 들어가는 문 대덕문.


삼국유사에 기록된 139가지의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중국과 이북지역을 제외한 이야기 현장을 찾아 스토리를 재구성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역사문화를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육성하는 작은 길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부터 약 20회에 걸쳐 신라가 나라로 출발해 1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흥망성쇠하는 과정을 간략한 삼국유사 이야기로 재구성해본다. 역사를 바탕으로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순수한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꾸민다.



어쩌면 역사 왜곡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역사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스토리텔링을 통한 다양한 문화적 콘테츠를 생산하는 골격을 세우는 방안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신라 최초의 왕인 박혁거세를 추대해 천년사직의 기반을 조성한 육부촌장들에 대한 내용이다.



육부촌은 지금의 경주 행정구역과 비슷한 지역 곳곳에서 각각 지역적 특성에 맞는 생산수단과 무기를 가지고 무술을 연마하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육부촌장들은 나라의 구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고, 훌륭한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사를 창출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을 통한 글이어서 역사적인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 양산촌 알평, 고허촌 소벌도리, 대수촌 구례마, 진지촌 지백호, 가리촌 지타, 고야촌 호진 등 육부촌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육부전.
▲ 양산촌 알평, 고허촌 소벌도리, 대수촌 구례마, 진지촌 지백호, 가리촌 지타, 고야촌 호진 등 육부촌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육부전.


◆진한 육부촌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마한과 진한, 변한 등의 부족국가들이 형성되고 있던 당시 태백산맥과 낙동강 줄기를 따라 진한지역에 여러 씨족들이 옹기종기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양산촌, 고허촌, 대수촌, 진지촌, 가리촌, 고야촌 등의 여섯 촌이 많은 촌락 중에서도 비교적 규모와 힘을 가진 촌락으로 진한의 중심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육부촌으로 불리고 있다.



육부촌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했던 부락은 양산촌이다. 남산의 북쪽, 월성을 중심으로 넓은 분지 지역이다. 남천과 북천 사이의 평평한 평야지대와 분지로 형성된 비옥한 땅에 다양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양산촌의 촌장은 알평이다. 후에 급량부로 불리는 지역으로 알평 촌장은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육부촌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했던 양산촌의 촌장 알평이 강림했다고 전하는 금강산의 광림대.
▲ 육부촌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했던 양산촌의 촌장 알평이 강림했다고 전하는 금강산의 광림대.


그 다음은 남산부로 불렸던 고허촌이다. 고허촌은 남산의 서쪽과 남쪽지역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의 경주 내남면과 울산 두서면 등으로 역시 넓은 평야지대에 접하고 있어 비옥한 땅에 농사를 지으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지역이었다. 촌장은 소벌도리로 경주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음은 월성 서쪽으로 산악지대에 형성되었던 대수촌이다. 지금 경주 서악동과 모량, 건천읍 지역이다. 단석산과 오봉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만 모량천을 중심으로 농토도 비교적 넓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촌장은 구례마로 불렸는데 경주 손씨의 시조가 되었다.



진지촌은 나중에 본피부로 불렸던 지역으로 황룡사 이남의 낭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촌장 지백호가 다스렸던 지역이다. 지금의 진평왕릉과 원성왕릉이 있는 일대까지 마을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지백호 촌장은 훗날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가리촌은 나중에 한기부로 불렸던 지역으로 양남면 등의 동해안 지역에 형성되었던 어촌마을이다. 해안마을에서 토함산 산악지대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며 해산물과 산에서 나는 임산물 등의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로 부족함이 없었다. 동해안에 위치해 왜구들의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이다. 촌장 지타는 나중에 경주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



여섯 번째 마을이 고야촌이다. 나중에 습비부로 불렸던 물이촌, 잉구진촌, 궐곡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는데 지금의 천북면 일대가 고야촌이다. 보문단지의 동쪽과 북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평야보다 산악지대가 많아 다양한 약초를 재배해 물물교환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촌장 호진은 나중에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 양산촌 알평 촌장이 강림해 목욕을 했다고 전하는 석혈. 광림대는 정각으로 보호하고 있다.
▲ 양산촌 알평 촌장이 강림해 목욕을 했다고 전하는 석혈. 광림대는 정각으로 보호하고 있다.




◆육부촌의 화합

육부촌은 저마다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왜구와 마한, 변한지역 등으로부터 침략을 받는 공통적인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특히 왜구들은 30~50명씩 무리를 지어 야간을 틈타 급습해 사람을 상하게도 하고, 먹을 것들을 약탈해 갔다. 왜구들의 노략질은 조직적이면서 야간을 틈타 워낙 민첩하게 움직여서 육부촌은 저마다 조직력과 무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75년에 왜구들이 대규모 선단을 꾸려 양산촌과 가리촌을 습격했다. 이때 퇴각하는 왜구들을 따라가 싸우던 양산촌 알평 촌장의 둘째 아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가리촌의 지타 촌장 셋째 딸도 왜구들에게 잡혀갔다. 인명을 살상하는 일은 좀체 없었지만 당시 왜구들이 워낙 대규모로 조직해 많은 식량을 도적질 하면서 사람들까지 상하게 해 육부촌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양산촌 알평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악강묘. 알평은 경주 이씨 시조로 경주이씨 문중에서 매년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악강묘 뒤편의 바위는 세상을 밝게 한 곳이라는 뜻으로 박바위 또는 표암으로 부른다. 문화재 기념물 제5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양산촌 알평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악강묘. 알평은 경주 이씨 시조로 경주이씨 문중에서 매년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악강묘 뒤편의 바위는 세상을 밝게 한 곳이라는 뜻으로 박바위 또는 표암으로 부른다. 문화재 기념물 제5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신속하게 치고 빠져버리는 왜구들의 노략질에 마땅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던 육부촌장들이 기원전 75년의 충격으로 고심 끝에 회합을 가졌다.



알평 촌장이 육부촌장들의 모임을 주선한 것이다. 왜구들의 대규모 노략질이 있었던 그해 추석 대보름날 양산촌장의 대저택에 육부촌장들이 각각 지장들과 차세대 건각들을 대동하고 모여들었다.



촌마다 20~30여명의 무리들이 병기를 지참하고 모이다보니 양산촌은 마치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병영처럼 되어버렸다. 한곳에 모인 젊은이들의 눈은 모두 매의 눈처럼 반들거렸다. 저마다 드러난 무기 외에도 품고 있는 암기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 양산촌 알평 촌장의 재실 표암재.
▲ 양산촌 알평 촌장의 재실 표암재.


키보다 큰 대도를 메고 있는 등치와 양날을 시퍼렇게 세운 쌍도끼, 예리하게 벼린 창날이 세 개씩 달린 삼지창, 쇠보다 야물다는 박달나무로 만든 봉, 한쪽 끝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휘어진 활을 멘 무사 등등의 무인들이 양산촌의 전각을 가득 메웠다.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받은 다음이라 청년들의 분위기는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어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육부촌장들과 함께 모인 무인들은 사흘째 먹고 마시며 서로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곳곳에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객기를 참지 못하고 무기를 서로 겨누며 힘자랑을 하는 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양산촌의 연무장은 백명의 무사들이 한꺼번에 말을 타고 달려도 좁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넓었다.

▲ 금산 가리촌의 지타 촌장은 명활산에서 처음 내려와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 월성 최후의 보루이자 선덕여왕 당시 비담이 난을 일으킬 때 근거지로 삼았던 명활산성.
▲ 금산 가리촌의 지타 촌장은 명활산에서 처음 내려와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 월성 최후의 보루이자 선덕여왕 당시 비담이 난을 일으킬 때 근거지로 삼았던 명활산성.


연무장 앞으로 이어진 전각들은 300명의 객들이 한꺼번에 묵으며 잠자리를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규모있게 지어져 있었다. 전각들이 가운데 넓은 마당을 두고 서로 마주보며 지붕을 맞대고 길게 이어져 비를 맞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었다.



촌장들의 본격적인 회의는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열려 점심을 함께 하며 저녁 무렵에야 끝이 났다. 회의는 알평 촌장이 진행을 맡아 일사천리로 이끌어 갔다. 모두 공통적인 어려움을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여서 의견은 쉽게 하나로 모였다.



알평 촌장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이웃해 있으면서 서로 싸우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가깝게 지내지도 못했소. 지난 봄에는 왜구들이 조직적으로 침략해 우리 양산촌과 가리촌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걸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이오”라며 운을 떼었다.



이어 “오래 전부터 짐작이야 서로 하고 있었지만 지금 모여보니 각 촌마다 훌륭한 무기와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을 뛰어난 인재들을 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칭찬도 했다.

▲ 경주 보문단지 입구 명활산성의 북문지를 발굴하고 최근 복원한 모습.
▲ 경주 보문단지 입구 명활산성의 북문지를 발굴하고 최근 복원한 모습.


알평촌장은 본론에 들어가 “우리는 서로가 강하지만 조직적으로 침략해오는 왜구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우리 육부촌이 중심이 되어 하나의 나라를 건설해 병사를 기른다면 누구도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지 못할 것”이라며 하나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가리촌 지타 촌장이 적극 찬성하고 나서자 함께 했던 촌장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나의 나라를 세워 우리의 평화를 지키자”고 만장일치로 알평 촌장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라를 세우면 왕이 있어야 하고, 재정과 병사, 나라를 운영할 규정 등등의 문제를 일치된 의견으로 해결해야 했다.



육부촌장들은 이 문제 또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음해 추석에 무술대회를 열어 우승한 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원만하게 경영하기 위한 조직은 양산촌의 운영방식을 준용해 만들고, 적합한 인물은 왕을 선발하고 난 다음 왕이 주선해 임명하기로 했다.



육부촌은 그때부터 폐쇄되었던 관계의 문을 열어 서로 소통하며 양산촌에서 정기적인 장시를 열어 활발한 물물교환을 시작했다. 이어 혼인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개방해 하나의 조직체로 만들어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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