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맑은 눈이 밝혀 주는 무인 판매대

발행일 2021-08-02 11:00:2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마을에 복숭아 등 농산물을 파는 무인 판매대가 있다. 시골 생활이라는 것이 지나가는 강아지 손이라도 빌릴 판국이니 판매대 앞에 앉아 있을 사람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쿠리에 담긴 과일이나 호박 등등의 기타 농산물을 그냥 가져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팔리는지 안 팔리는지는 몰라도 농산물은 낮이나 밤이나 손님을 기다리며 가판대 위에 놓여 있다.

돈을 넣는 돈통도 그냥 검은 비닐봉지다. 거기에 농산물을 가져다 놓는 할머니는 누가 가져가든 말든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가판대 위의 과일을 그냥 가져가 먹는 사람은 그거 하나 사 먹을 돈도 없는 어려운 사람일 것이니 일부러 줘도 줄 것인데 가져가도 괜찮다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몇 년 동안 그냥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신다.

양심이란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인데 무인 판매대 위의 물건을 그냥 가져가는 것은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러니 그 판매대 앞에서 어떤 과일을 가져갈 것인지 망설이는 일은 있어도 돈을 넣지 않고 가져갈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 자신이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도둑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무인 판매대의 물건을 그냥 가져가는 것은 도둑처럼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거기에 있는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무인 판매대 앞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계산을 하고 온다.

만약 그 무인 판매대 앞에 시골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면 에누리도 있었을 것이고 덤도 있었을 것이다. 무인 판매대는 그런 소소한 재미는 누리지 못하지만 그 대신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있을 것이다. 무인 판매대의 물건들은 대부분 몇 만원을 넘지 않는다. 기껏해야 과일 한 박스부터 적게는 몇 천원 하는 과일 한 소쿠리이다.

주인 할머니는 가끔 들러 부족한 과일이나 농산물을 채워 넣고는 또 밭으로 유유히 사라지시는데 그 뒷모습에는 무인 판매대에 대한 의혹이 전혀 없다. 그냥 가져가거나, 계산하고 가져가거나 그 자체에 별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가져간다면 가난한 사람이 가져가서 먹을 것이니 그것도 기분 좋은 일이고, 계산하고 가져간다면 돈을 벌었으니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이 할머니의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이 욕심 때문인 줄은 누구나 알지만 그 욕심을 버리기가 어디 쉬운가. 더군다나 물건이 돈으로 바뀌는 장사를 해 본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현대인들의 모든 노동은 화폐로 바뀌고 있으며, 그 노동에서 파생되는 물건 또한 화폐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모든 노동이나 물건이 화폐 가치로 바뀌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무인 판매대는 그런 기존의 법칙에서 비켜나 있다. 무인 판매대를 만들 때부터 주인은 그냥 가져가는 사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비움으로써 무인 판매대는 비로소 거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나다니면서 그 무인 판매대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판매대 위에 얹힌 물건들을 살펴보는 습관이 들었다. 전에 보았던 호박은 팔렸는지, 복숭아는 얼마나 줄어 들었는지, 또 어떤 새로운 농산물을 가져다 놓았는지 호기심이 생겨서이다. 가끔 저녁 무렵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 그 무인 판매대 주변의 의자에 앉아서 풀 부채를 부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런 날, 어떤 사람이 무인 판매대에 들리기라도 하면 할머니들이 덤으로 주는 농산물을 얻어 가는 행운도 누릴 것이다. 이 산골 마을에서 늙어가는 사람들은 도시의 셈법과는 다른 셈법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천영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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