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게 두둥실 떠 있고 길은 훤하게 비어 한산하다.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다. 7말8초 코로나가 한창이지만, 잠시의 여름휴가를 떠난 이들이 많은가 보다. 멀리 휴가지로 떠나가지 못한 이들은 모 방송사 주말 미니시리즈를 몰아볼 것이라며 열을 올린다. ‘결 사 곡’이라고 부른다던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이라는 드라마의 시즌 마무리를 앞두고 스페셜 방송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아이 엄마들도 많아 덩달아 기대가 된다. 드라마에 익숙지는 않지만, 간간이 문이 열릴 때마다 들려오는 대기실의 아이 엄마들의 커다란 대화 소리로도 그 인기를 가늠하고도 남을 것 같다. 언젠가 나도 그 드라마를 한번 몰아서 다 보리라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드디어 나만의 공간에서 진료 시작함을 알렸다. 7자가 여러 개 들어가는 7월27일에. 정말 가까운 몇 분에게만 소식을 전했는데 어찌 알았는지 화분과 쌀이 도착하기 시작해 복도를 메운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들이 지나가다 현수막을 보고 올라왔다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한다. 10여 년 전 사흘이 멀다고 병치레 하는 아이 때문에 입원을 밥 먹듯이 하던 가족. 병실 하나를 아예 전세라도 들어야겠다던 아이는 훌쩍 자라 내 키를 넘어섰고, 병원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며 울먹이던 엄마는 어느덧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서 병원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단다. 인연이 다시 맺어지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을 정도로 마음에 남아있던 이들이다.

개원하면서 기념품으로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이 됐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수건을 준비했다. 상호 이름이 들어간 수건으로 한여름 땡볕에 그늘도 없이 앉아서 물건을 팔거나 거리에서 노점 하는 분들에게 나누면 좋겠다 싶었다. 시장 근처에 자리 잡다 보니 병원을 들락거리는 차들과 아이들이 어쩌면 그분들께 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성가시게 되지 않을까 염려도 됐다. 상인회 회원 모두, 거리에 앉은 이 모두를 헤아리니 그 수가 상당했다. 그래도 골고루 돌아가면 좋지 않을까 해 상인회 대표에게 숫자대로 보냈더니 이튿날 바로 기별이 왔다. 찾아오는 손님은 가능한 근처 시장 안 점포로 안내해 간단하게 대접하는데 그 식당 주인이 알아보고는 콩국수를 곱빼기도 넘게 담아줬다. 얼마나 정성스레 많이 담았던지 남기지도 못하고, 먹고는 바로 소화제를 먹어야 할 정도였다. 작은 것이라도 잊지 않고 챙겨주며 보답하고자 하는 고마운 이웃들과 함께 내내 앞날이 즐거울 것 같아 하루하루가 기대된다. 새로운 터전이 신기하고 행복하다.

병원 복도에는 신사임당 나무가 가득하다. 의미를 물으니 신사임당 얼굴이 5만 원 지폐에 들어가 있으니 나날이 번창해 오만 원짜리가 주렁주렁 열리라는 뜻이란다. 가까이 두고 보라고 보내온 화분은 군자란이 태반이다. 군자란의 꽃말은 ‘반드시 찾아오는 행운’이라니. 여드름투성이 고등학생이 땀 뻘뻘 흘리며 안고 들어온 주황색의 군자란처럼 나에게 행운은 반드시 찾아올 것 같아 더 기운이 난다.

꽃과 나무와 쌀 화환으로 가득한 진료실과 병원을 보면서 그동안 나는 그분들께 무엇을 해드렸을까.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건너편 병원에 근무하는 선배는 병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환자들이 찾아오기 힘들 것이라면서 현수막을 다시 해서 걸어놓으라고 조언하신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전공한 원로 선배님은 이제야 보살이 서남 시장가에 자리를 잡아 제대로 보시를 시작하는 것 같다며 늦었지만, 열심히 놀지 말고 하라고 놀려대신다. 모두가 자기 일만 하기에도 바쁜 세상에 이렇게 관심을 듬뿍 담아 조언해주심이 얼마나 고마운지 가슴을 울린다.

오랫동안 근무한 병원의 환자들은 그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했는데 개원 소식이 반갑다며 카톡을 울려댄다. 병원 위치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왔다는 이, 아이 학교 학부모들한테 소식을 알았다는 이. 책을 냈다는 걸 블로그를 보고서 알게 돼 찾아왔다는 이 등 여러 곳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다. 앞으로 꿈을 안고 나아갈 33년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 책을 묶었다.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 그동안엔 개원 준비에 바빠 미루고 있었지만, 이제 베풀어준 정성에 보답하는 의미로 한 분씩 보내려고 한다. 그 첫 시작으로, 문득 생각나서 들렀다는 고등학생 아이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제목을 뚫어지게 보고 있기에 감동으로 그런가? 슬쩍 물어봤다. “복사꽃이 무슨 뜻일까?” 그가 씩씩하게 답한다. “복사한 꽃, Printed Flower, 아닌가 여?” 유창한 발음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는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하는 그 녀석에게 뭐라 대꾸해야 할까? 그냥 웃지요. 그냥 가만히 웃어줄 수밖에. 무엇을 상상하든 때로는 그 이상인 경우도 많을 테니까.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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