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가 경련을 해 외래에 방문했다. 뇌파검사를 시행해 경련파가 관찰돼 부모님에게 뇌전증이라고 진단하고, 치료 기간과 예후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애기 아빠가 아내 쪽을 바라보면서 퉁명스럽게 불쑥 내뱉었다. “이 병이 유전병인가요?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요” 그 순간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 애기 아빠에게 “가족력의 경향을 보이는 뇌전증의 종류도 있지만, 유전병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엄마나 아빠의 잘못으로 아이에게 이 병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아빠가 질문한 “유전병인가?” 하는 물음 뒤에는 “나 때문에 아이에게 이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묻어 있었기에, 추가한 한마디가 보호자의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불안을 불식시키고 신뢰관계속에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의사에게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냉철한 지식과 에둘러 표현하는 환자와 가족의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이 필요하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보면 돌아온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양손이 다르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 손이고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의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이 양손을 통해 표현하고 있듯이, 취약한 사람을 감싸 안을 때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독일의 뮌헨에는 구 미술관(Alte Pinakothek)과 신 미술관(Neue Pinakothek)이 있다. 뮌헨 거주자는 주말에 1유로만 내면 하루종일 미술품을 즐길 수 있고, 구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빛의 향연과 같은 렘브란트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접하면서 그와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받았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젊은 날의 찬란한 성취와 명성의 뒤안길에서 고통스럽고 좌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들과 두 딸의 죽음을 봐야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를 먼저 보내고, 어린 아들의 유모와 맺은 관계로 더욱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화가로서의 명성도 추락했고 재정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은 성경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은 방탕해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먼 나라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급기야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됐다.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면서,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풍성한 시절이 생각났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풍족히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느니 아버지 집에서 품꾼이 되는 편이 좋았다. 이렇게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안고 입맞추면서 잔치를 벌인다.

가로 1.8m, 세로 2.4m의 큰 화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노인이 거지 같은 사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거의 눈이 먼 아버지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말없이 안아주고 있고, 아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깎여져 있고, 다 닳은 샌들이 벗겨져 드러난 발바닥은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혀 있다. 온갖 풍상을 겪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에 한없이 따사로운 빛이 비추고 있다.

그 오른 편에는 껴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이 집의 맏아들이 서 있다. 그리고 중간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인물과 하녀인 듯한 여자가 보인다.

압권은 이미 언급한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다. 강인함을 나타내는 왼손과 다정함을 드러내는 오른손을 통해 그 안에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있다. 인생의 온갖 고초와 고난을 겪은 말년의 렘브란트가 ‘탕자의 귀향’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의 감동과 위로를 줬듯이, 여러가지 질병과 발달 지연으로 나를 찾아오는 환아와 그 가족에게 의료의 지식뿐만 아니라 위로와 치유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따뜻한 의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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