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이화경

발행일 2021-07-14 14:26:4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 토끼는 토끼의 슬픔 ~

…인석은 서른 살에 숨을 거뒀다. 그는 스무 명이 넘는 지인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이다. 사달이 났을 때 마치 토끼처럼 토꼈다. 사기인 줄 알고 했는지, 그도 사기를 당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도망가다 보면 서고 싶어도 가속이 붙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토끼는 날고 싶었지만 날 수 없었다./ 1997년은 미영에겐 악몽이었다. 병든 아버지가 전세금까지 탕진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작은 여행사를 차렸다. 경쟁이 심했지만 여행 붐을 타고 잠시 순항했다. 그러던 중 IMF와 사스가 터져 여행자의 발길이 끊겼다. 모녀의 삶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어머니는 신용불량자였다. 먹고살기도 힘겨웠지만 미영은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미영 명의로 여기저기 학자금대출을 받고 신용카드를 여러 개 발급받아 돌려막기로 연명했다. 은행과 캐피탈은 인정사정없다. 미납금 독촉전화가 빗발쳤다. 막다른 골목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고교 때 알고 지냈던 인석이 만나자고 했다. 휴대폰 다단계를 권했다. 미심쩍은 점이 있었지만 당장 돈이 급해 유혹에 넘어갔다. 미영은 친구들을 엮어 넣었다. 손쉬운 돈벌이라는 생각에 다들 의심 없이 미끼를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리점은 문을 닫았고 점주는 잠적했다. 인석도 사라졌다. 미영은 졸지에 사기꾼이 됐다. 법원의 출두명령이 떨어졌다. 고교 친구를 통해 인석의 행적을 추적했다. 미영과 피해자들은 서울 로데오 거리로 출동했다. 정보원의 도움을 받아 신촌의 한 모텔에서 그를 잡았다. 그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그는 토끼는 토끼였지만 토끼지 못한 토끼였다. 다른 사람은 돈을 마련하여 해결책을 찾았지만 융통할 곳이 없는 미영은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25층 아파트에 올라갔지만 용기가 없어 다시 내려왔다. 심한 몸살을 앓았다. 마음은 다소 가라앉았다./ 미영은 등록금을 내지 못해 제적되었다. 청춘은 가고 서른이 되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뱃속이 부글거려서 뭔가 싸지르고 싶다. 인석은 신 내림을 받았다고 했다. 미영의 경험으로 보아 무병이 아니라 정신병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하다가 부고를 받고 말았다. 미영은 막장에 몰린 사람에게 대출을 권유하는 일을 하고 살았다./ 인석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영의 집은 거실과 방 한 칸이었지만 둘이 살기엔 불편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미영이 좋아하는 카레를 해주었다. 카레엔 토끼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인생은 고해다. 세상은 가난한 사람에게 더 사정없이 대한다. 죄 없이 가난을 대물림 받은 억울한 청춘은 참담하다. 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토끼는 토끼처럼 흙수저 청춘은 처절한 질곡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가난은 몸부림칠수록 가라앉는 늪과 같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심신을 괴롭히는 불행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석은 그토록 도망가고자 노력했지만 잡히고 만다. 무병으로 오인해 신 내림을 받았지만 급성 간경화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그는 가난한 현실에서 토끼는 토끼다. 미영도 천형과도 같은 부조리의 순환 고리를 끊어보고자 애써보지만 막장에 몰린 사람에게 재갈을 물리며 먹고산다. 토끼고기가 들어간 카레를 먹는 알레고리가 슬프다. 이젠 성공적으로 토끼는 토끼를 보고 싶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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