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계통신」 (작가, 2006)
같은 하늘 아래, 눈앞에서 숨 쉬고 사는 것 같지만 제각기 자기만의 세상을 갖는다. 바람과 별과 햇빛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판이하다. 바람을 두고 아픈 머리를 힐링해 준다고 좋아하는 사람, 곱게 빗은 머리카락을 흩어놓는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기타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름답다고 그대에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햇빛만 보면 옷을 벗어버리고 일광욕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지만 경기 하듯 파라솔을 펼쳐드는 사람도 있다.
몸은 가까이 있어도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세상에 살고 있다. 바로 옆에서 함께 부대껴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산하로 가로막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리. 동일한 태양계 하늘 아래, 지구촌의 대지 위에 발을 딛고 함께 산다고 해, 내 하늘과 그대 하늘이 같다는 생각은 객관적인 시각인 것은 맞지만, 정신적으론 전혀 다른 하늘이다. 실제 내 별과 그대의 별은 전혀 별개다. 그렇다고 벽을 쌓고 살 일은 아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다. 몸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아무런 관계없이 마음만 열어두면 서로 소통 가능하다. 역지사지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서로의 사정을 배려할 마음가짐이 돼있다면 산천이 가로막혀도 장애가 되지 못한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 시공을 초월해 같은 하늘 아래서 누구와도 호흡을 맞출 수 있다. 가슴을 맞대어 사람의 향기에 취하리니.
부자의 하늘과 빈자의 하늘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보수주의자의 하늘과 진보주의자의 하늘이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남자의 하늘과 여자의 하늘이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하늘과 이방인의 하늘이 색다르다고 하더라도, 젊은이의 하늘과 노인의 하늘이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진정성만 확고하다면 막힌 장벽을 헐고 같은 하늘 아래 손잡고 등 토닥이며 살아갈 수 있다.
고답적인 진리를 참신하고 신선한 시각으로 눈높이를 낮춰주면서 오히려 시의 품격을 올려놓은 솜씨가 범상치 않다. 연도 없고 쉼도 없이 이어지는 산문시이지만 내재율이 살아있어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맛이 일품이다. 세상은 ‘그 하늘, 이 하늘’로 확연히 나눠져 있다. 시인은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춤 출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대와 함께 블루스를 추고 싶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