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꽃이더니 죽어 별이 된 사람/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서로 잊고 산 걸까,/나 오늘 별 따러 가네, 말려도 소용없겠네//무법천지 철쭉공화국 만장일치 붉은 함성에/펄럭이는 깃발처럼 허공에 사로잡히네/까마득 먼 그대 적막을 눈멀도록 응시하다//

내 영혼의 국경 넘어 꽃을 들고 밀입국하던/당신은 나의 신전, 비바람도 두렵지 않던/피 묻은 입술을 핥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던//꽃그늘에 이녁을 묻고 돌아서던 그날처럼/무심한 척 흘려두신 흰 구름 오래 읽으며/나 오늘 울어도 좋겠네, 달래도 소용없겠네

「정음시조」(2021, 3집)

박해성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0년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루머처럼, 유머처럼’, ‘판타지아, 발해’, ‘우주로 가는 포차’ 등이 있다.

‘황매산에서’는 호흡이 유장한 시조다. 거침없는 전개도 눈길을 끈다. 먼저 살아서 꽃이더니 죽어 별이 된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서로 잊고 산 걸까, 라고 묻다가 나 오늘 별 따러 가네, 말려도 소용없겠네, 라면서 혼잣말을 한다. 무법천지 철쭉공화국 만장일치 붉은 함성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허공에 사로잡히네, 라는 대목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그 누구도 쉬이 좇을 수 없는 기개와 미의식의 도저한 발현이다. 그러다가 까마득 먼 그대 적막을 눈멀도록 응시하기도 한다. 이어서 내 영혼의 국경 넘어 꽃을 들고 밀입국하던 당신을 생각하면서 당신은 나의 신전, 비바람도 두렵지 않던 이였고, 피 묻은 입술을 핥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던 사이였음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꽃그늘에 이녁을 묻고 돌아서던 그날처럼, 에서 보듯 듣는 이를 조금 낮춰 가리키는 말인 이녁을 등장시켜서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 또한 무심한 척 흘려두신 흰 구름 오래 읽으며 시의 화자는 나 오늘 울어도 좋겠네, 달래도 소용없겠네, 라고 내 울음에 대해 그 누구도 상관하지 말 것을, 달래거나 다독이지도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한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과 대병면, 산청군 차황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기암괴석이 곳곳에 분포해 경치가 아름다우며, 정상부에서는 북동쪽으로 합천호가 내려다보인다. 시와 무관하게 사는 이들에게도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인 산이다. 시의 화자는 무법천지 철쭉공화국 만장일치 붉은 함성, 이라는 의미부여를 통해 봄날에 만개한 철쭉천지 앞에 경탄한다. 그러나 ‘황매산에서’는 찬탄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꽃그늘에 이녁을 묻고 돌아서던 그날을 떠올리면서 나의 신전이었던 당신에 관한 서사의 일부분을 셋째수와 넷째 수에 노정함으로써 작품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시종 넘실거리는 가락과 탄력을 함유한 미적 발화로 말미암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게 만든다. 운율종결 어미인 네, 를 적절히 활용한 점과 미완의 문장인 각운 던, 을 세 번 쓴 것도 묘한 매력을 안긴다. 시의 화자인 내 영혼의 국경 넘어 꽃을 들고 밀입국하던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피 묻은 입술을 핥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던 그는 살아서는 꽃이었다가 죽어 별이 된 사람이었다고 첫수 초장에서 노래한 것에서 보듯 ‘황매산에서’는 이룰 수 없는 어쩌면 이미 이뤄진 슬픈 사랑 노래다.

그의 시 세계가 어디까지 내닫을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할 상상력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축조하기 위해 다각도로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독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다만 그가 쓰리고 아픈 황홀한 길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디디고 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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